변화를 가로막는 이유, 변화의 폭이 다른 이유
<질문>
변화가 없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 일까요?
만약 체험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졌다면,
변화가 폭이 큰 체험과 작은 체험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어제 글에서 처럼
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3가지 변화를 경험했다.
하느님 방향을 향한 회개,
자연을 향한 생각의 확장
그리고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기였다.
내 삶이 내 의지대로
오롯이 하느님을 향해 변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어제 글에서처럼
다시 돌아가려는 관성을
잡아끌며 늘 애를 쓴다.
가끔은 방향을 돌리는 일이
순조로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단하고 버겁다.
왜일까?
아마 나만 혼자 애쓰고
막상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거다.
아무도 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때
부르심을 따라
‘네,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고 용감히 나섰는데
그 길은 늘 너무 고단했다.
돌아와 보면
나만 파김치가 된 채 쓰러지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모두 안락하고 행복해 보인다.
내 선택은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관성을 거스르려 애쓰지 말고
편히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왜 나는 변화하려고 애쓰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일까?
다 같이 주님을 따르는데
왜 나만 고달픈 걸까?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일까?
이렇게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는데
왜 나는 여전히 제자리이고
다른 사람을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걸까?
왜? 왜? 왜?
묻고 또 묻는다.
주님께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때 맞춰 내게 들려주신다.
꼭 그런 날, 그런 글을 읽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타자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 온전해지도록 돕기 위해
타자에게 다가가는 사람만을
진정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 진정한 평화를 누렸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해방되셨다고 했다.
난 여전히
내가 변하니 그대들도 변해야 한다며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내면엔 평화가 없었고,
누군가를 바꾸려는 욕망만 가득했다.
그러니
억울했고, 답답했고, 속상했고, 원망만 가득했다.
변화의 지속과 편안함을 위해
내가 갈 길을 아직 멀기만 하다.
매일 퇴로를 열어 놓고
기회만 엿보는 것 같다.
단번에 변화할 줄 알았던
불타는 신앙심은
금세 수그러들고 재가 되려 한다.
하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이뤄야 하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변화를 가로막고 변화의 폭이 다른 이유는
조급함, 성급함, 섣부름
그리고 여전히
시대적 흐름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충돌하고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변화를 주저하는 나를 위해 들려주신 말씀
같았던 갈라디아서를 읽으며
다시 또 방향을 돌려본다
'언젠가는 평온해지겠지'라는 바람으로.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합시다.
(갈라 6,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