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에서 하느님께 바라는 점
<질문>
이웃과 사회 안에서 하느님께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바라는 하느님의 도우심은 무엇일까요?
관계 소통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관련된 교육을 많이 했다. 아마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부모교육’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 ‘청소년들’에게는 자신과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오랜 교육과정을 통해 ‘성향별 관계 소통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많은 호응을 받아 다양한 강의를 했다. 이는 학교와 기업에서 ‘성공적인 학습 및 업무 코칭 과정’으로 확장되었다.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을 성향별, 태도 별로 ‘유형화’했다. 유형별로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행동을 공유했고, 이 사람들은 이러한 성향을 갖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할 때 좋은 관계 및 성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교육했다. 교육을 할수록 평가도 좋았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신기해하고, 효과가 좋다고 했다. 상담을 한 후 온라인 검사를 실시하면 대략 처음에 생각한 대로 검사 결과가 나왔다. 오랫동안 지속된 만남이 아닌 경우, 한 번의 상담과 검사로 그 사람의 유형을 판단하고 이에 따른 후속 교육은 짧게는 1회 길어야 8회 정도로 진행된다. 평가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사실 오랜 시간 자신이 갖고 온 성향을 8회 교육으로 변화한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님과 학교, 직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효과를 요구하는 교육을 원했다. 최소비용으로 최대의 효과 가장 효율성 있는 작업을 원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이 전문가가 될수록 점점 더 회의가 들었다. 사람을 보면 아... 어떤 유형이겠구나. 하고 바로 판단하게 됐고,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진솔한 만남 없이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을 검사하고 판단하고 그래서 바람직하다고는 하나 그의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관련된 강의를 쉬고 있다. 어쩌면 영영 하지 않을 것 같다.
관계란 방법의 탐구가 아니라 이해와 성찰의 노력이다. 검사를 통해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고민하고 성찰해서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였다. 다만 고민과 성찰에는 답이 없다. 사람들은 보다 빠르게 보다 확실한 결과를 얻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싶어 시작한 교육이었다. 갈등이 있는 경우엔 서로의 성향이 이러하니, 이렇게 접근하고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고,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안 오르거나, 유난히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관계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겐 팁을 제공했다. 솔루션으로서 이 방법은 괜찮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솔루션 이전에 스스로 성찰하고 돌아보는 시간이 꼭 필요한 일이었음에도 더 빠르고 더 효과적인 결과를 위해 번번이 이 단계는 패스되었다.
신앙 안에서 관계에 관해 돌아보게 되니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기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에서는 만남과 대화를 통한 관계 소통의 과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인생은 충돌이 많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만남의 예술’이라 했다.
“다면체의 이미지는 불일치와 유보 속에서도 차이가 공존하고, 서로를 보완하고, 풍부하게 하며, 상호 조명하는 사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모두 쓸모가 있습니다. 누구도 소모품이 되어선 안 됩니다.” [215]
만남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말한다. 다름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린 또 성장할 수 있다. 요령과 방법이 아닌 이해와 공감을 통해 서로를 인정할 수 있길 바란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자신을 내어주도록’ 창조되었기에 이 방식이 아니고는 살 수 없고, 발전할 수 없으며, 무엇을 성취하기도 어렵습니다. [87]”
따라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을 완전히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삶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이다.
“다가가고, 자신을 표현하고, 서로 듣고 보고,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며, 공통점을 찾아가는 이 모든 시도들을 “대화”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서로 만나고 돕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198]
“의견 불일치와 갈등과 달리 끈질기고 용감한 대화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진 못하지만 세상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조용히 도와줍니다.”[198]
“사라센인들과 다른 불신자들 한가운데 있게 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지 않고 “논쟁이나 설전을 벌이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피조물인 모든 인간에게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3]
관계 속에서 우리는 나와 맞는 사람을 구하고 그들만 가까이하는 대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함을 배운다.
+ 주님 바라오니,
힘겹게 여겨지는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제 뜻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오롯이 바라보게 해 주소서.
그를 제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바꾸려 하지 말고
함께 서로의 영역을 공유하게 해 주소서.
그가 저를 힘들게 할 때면
그 또한 저 때문에 힘듦을 제가 깨닫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구별과 편견 대신 괄호 치기와 판단 중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