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영국의 듀오 '버글스(Buggles)'는 1981년 M-TV의 시작을 알리는 “Video Killed Radio Star"라는 충격적인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대중음악의 전달도구가 라디오에서 시각중심의 텔레비전으로 바뀌는 시대 상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시각적 화려함으로 무장한 뮤직비디오가 눈과 귀를 강렬하게 자극하여 귀로만 듣던 라디오는 지루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노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인 것일까.
글을 쓰는 도구 중 라디오와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우개다. 지우개는 한 번도 글쓰기 문화에서 자신의 색깔을 보여준 적이 없다. 지우개의 임무는 연필로 쓴 글씨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지우개 똥으로 승화하는 것, 그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유의 임무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더 이상 연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는 손글씨 보다는 컴퓨터로 글을 쓰니 지우개는 더욱더 찬밥 신세다.
이 세상을 살펴보면 지우개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묵묵히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대 패러다임의 변화로 직업의 존재가치를 잃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요즘 아파트 경비원을 대신하여 CCTV나 비밀번호 자동문 등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하는 아파트가 늘고 있다. 아파트 경비원들이 지우개가 되어버렸다. 삶의 편리와 아파트 관리 비용을 줄이기 위해 경비 인력을 최소화하려 한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 경비원들의 나이가 60대 이상의 고령이다. 이들이 이름 그대로의 경비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아파트 측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안전한 생활을 위해 기계 시스템만으로 공간을 관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신속하게 사람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인구 고령화로 인해 아파트에는 노인 독신자가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밤중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누가 대처할 것인가. 기계가 급한 순간 대처할 수는 없다. 편리한 삶과 효율(경비절감)에 집착하여 기계에 너무 많은 삶을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의 패러다임이 변하면 그에 따라 피해를 보는 계층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계층이나 사물들과 함께 한 문화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택배를 찾으러 가면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드리는 것, 그리고 이웃 간의 분쟁을 법에 앞서 해결해주는 훈훈한 장면은 더는 보기 힘든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CCTV를 활용한 외주경비체계와 무인택배함이 아파트 문화를 점점 채워나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적 풍요와 주거의 편리함 덕분에 이웃 간의 교류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과연 지금처럼 CCTV를 설치하여 이웃 간의 경계심 또한 높아진 사회를 먼 훗날 기억하고 싶어 할까. 예전보다 배고픔은 덜 한데,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률은 증가하는 현상은 새로운 변화에 따른 부산물일 수도 있다.
1979년에 'Buggles'는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고 노래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꼭 유효하지는 않다. 라디오 스타는 아직도 살아남았다. 1980년대 보다 더욱더 시각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말이다). 아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날로그 감성 때문이 아닐까. 기술이 진보하여도 인간은 인간인가보다. 경비 절감 차원에서 아파트 경비원을 없애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아직은 아파트 경비원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