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목욕탕집 형의 각 잡힌 바지
아버지와 같이 옛날 살았던 동네를 우연히 지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옛날 생각이 나셨는지 자주 다니시던 약국을 보시고는 잠시 들러보자 하셨다. 사십여 년 전 처럼 아직도 약국아저씨는 그 옛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군가는 벌써 돌아가시고 누군가는 또 요양병원에 있다는 대화가 오래 이어졌다. 열 살 때 이사와 벌써 오십이 된 나는 목욕탕 집 형이 궁금해졌다.
70년대 말에는 옷이라고 해 봐야 이웃집 형의 옷을 물려받거나 무릎이 툭 튀어나온 체육복이나 빨간 내복이 다였던 시절이었다. 돕빠나 돗구리 같은 일본말이 여지없이 사용되고 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만 하던 시절이라 코를 닦은 소매부분은 늘 반질반질했다. 사실 때 국물이 줄줄 흐르던 참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서너 달에 한 번씩은 멋진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단정하고 절도가 있어 보이는 사관학교 제복을 입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씩씩하게 걸어오던 이가 있었다. 목욕탕 집 형이었다. 어떤 날은 친구처럼 보이는 이들이 같은 발걸음으로 오기도 했다. 칼 주름이 잡힌 바지와 팔목 부분에 새겨진 단선의 브이자 검정 줄무늬, 단정하게 깎은 머리, 모든 것들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어깨에는 초록 견장위에 흰색의 계급장을 달고 007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에 반해 버렸고 그 형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구경만 하다가 언젠가 아버지를 졸라 목욕탕 집에 놀러가서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나의 우상이 되었고 내 꿈은 당연히 사관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형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기다렸다가 뒤따라가며 같이 걷는 흉내도 내고 왼손에 가방을 들고 오른팔을 흔들며 걸어가기도 했다.
당시 그 집은 목욕탕 집이라 아주 부잣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넓은 목욕탕은 아니었지만 어린 꼬마의 눈에는 넓어보였고 최고의 부잣집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책들이 거실에 꽂혀 있었다. 형의 권유로 책을 한권 빌려보게 되었는데 '펄벅'의 '대지'였다. 꽤나 긴 소설이었는데 나는 무리 없이 잘 읽어나갔다. 그 이유는 바로 주인공인 '왕룽'의 셋째 아들 때문이었다. 멋진 장교가 되어 부하들을 거느리고 중국 대륙을 활보하는 모습이 목욕탕 집 형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형은 나의 마음을 알고 사관학교에 가기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일단 성적이 좋아야하고 체력이 좋아야하며 성실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을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개근상을 다 받은 것도 그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요구하는 체력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삼년 내내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을 뛰고 턱걸이도 연습하면서 미래의 꿈을 키웠다.
아직도 해군사관학교의 거북선은 눈에 선하다. 푸른 바다위에 떠 있던 거북선과 연병장 그리고 하얀 건물들. 신체검사장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나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시력이 걸림돌이 되었다. 미리 동네 안경점에서 적어온 시력측정기의 도표를 완전히 다 외웠었다. 새, 말, 나비, 7, 9 등등. 그러나 아뿔싸 시력 측정장에 있던 도표는 영 딴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산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시원한 탈락이었다. 상심한 나는 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R.O.T.C 제도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준비를 잘 해서 합격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저씨의 대화중에 목욕탕 집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그리고 그 형의 이야기도 들렸다. 아직도 동네에 살고 있고 종종 약국에 들르기도 한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도 이제 환갑을 넘었을 터다.
정작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주변의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말이다. 그가 하는 말을 따라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나는 말끝에 ‘다’ 나 ‘까’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뭐뭐 했어요’ 라고 하면 상대에게 말을 하대한다는 느낌이 있어 ‘뭐뭐 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말한다. 바지도 여전히 주름이 선 양복바지를 입을 때가 많다. 그런 연유로 내가 누군가에게 내 행동이나 말로 혹은 그 모습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다. 이제야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니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내 행동거지에 변화를 주고 지켜볼 일이다. 그 옛날 그를 지켜보던 나처럼 오늘날 누군가에게 목욕탕 집 형의 칼 주름 바지로 비쳐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