떫은 봄에서 달달한 가을로 익어가는 시간
무료한 토요일 오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요즘 뜨는 신규 분양 아파트가 있다는 겁니다. 지하철역과의 거리가 코앞이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가 지척이니 프리미엄이 금방 붙을 거라고 했습니다. 근근이 빚을 내어 집을 마련한터라 '그만 됐네, 이 사람아, 자네나 잘 해보게' 해놓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가만가만 전화 통화를 더듬어 보니 그 재개발한다는 동네가 눈에 그려지는 겁니다.
아내와 나는 늘 그 골목에서 헤어졌습니다. 대구교육대학을 뒤로하고 조금 걸어 오르면 첫 번째 골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고 다시 왼쪽으로 돌면 막다른 골목. 한 사람이 양팔을 흔들며 지나가기 아주 적당한 폭. 작별의 키스를 기대하며 내심 기회만 엿보는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나무 대문을 열고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습니다. 저는 늘 거기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갈 땐 그 짧은 거리가 돌아 나올 땐 어찌나 멀던지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두어해 지나 결혼을 했습니다. 드디어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아내와 같이 골목을 들어서고 돌아 나오고, 참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골목길 양쪽 집과 건넌방 아저씨와 구멍가게 아주머니까지 저를 알아보았으니까요. 예쁜 색시 얻었다며 아내에 대한 칭찬을 무지하게 들었습니다. 막다른 골목 끝집은 정원도 아름다웠습니다. 심지어 더덕까지도 담장을 기어올랐으니 그 풍성한 정원은 저를 희망의 푸른 숲으로 인도하곤 했습니다. 어른들이 한 눈을 파시면 저는 아내가 너무 좋아 몰래 껴안기도 했습니다. 첫아이가 들어서고 우리는 그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여름엔 수돗가에서 등물을 하고 대청에 앉아 기울어가는 보름달을 보고 소원도 빌었습니다. 날이 좋으면 마당에서 삼겹살도 굽고 시원한 수박을 툭툭 잘라 먹었지요. 시간은 잘도 흘렀습니다. 이제 그 어른들은 저 멀리 가시고 그때 난 꼬맹이들이 대학생들이 되어 있으니까요.
저녁 무렵 지하철을 타고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장인 장모님의 신혼시절, 그리고 아내의 유년, 또 저의 신혼이 고스란히 흔적을 담고 있는 집에는 철거예정이라는 노란 띠가 붙어 있었습니다. 아내와의 헤어짐이 애틋했던 골목길은 제 기억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골목을 돌아서니 비록 금이 가고 색은 바래었지만 옛집은 여전히 꼿꼿하게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한참을 서서 제 과거를 돌아 보았습니다. 과거는 조용히 돌아와 제 현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옛집은 말없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옛날 처음 그 집을 들어섰을 때 저를 담담히 내려보시던 장인어른처럼 말이죠. 금방이라도 '아이고 홍 서방 왔는가' 하고 장모님이 달려 나올 실 것 같았습니다. 대문 틈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본 집에는 거짓말처럼 담쟁이가 과거를 타 넘고 있었습니다. 정원의 나무들은 집의 운명을 아는지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사랑을 나누던 방은 거기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지금이 지금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헛갈렸습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었던 거지요.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날은 자꾸 어두워져 가고 나는 거기서 혼자 온갖 감상에 다 젖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서 어딘지 확인하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골목에서 길을 잃지나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 자리로 다시 돌아와야 했지요. 그때의 저는 이미 현재 속에 묻혀 있으니까요. 그곳은 또 누군가의 미래로 한 생으로 흘러갈겁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흔적을 남기고 또 지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과거가 완전히 철거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다녀와야겠습니다. 아내와 같이 동행하는 건, 글쎄요,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저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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