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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Feb 28. 2024

아파트 유감

  1987년에 우리 집은 대구의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AID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외국의 차관으로 지은 아파트였는데, 당시 만촌동 일대에는 교수와 기자들이 많이 살아서 교수촌 혹은 기자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단돈 800만 원에 오 층 아파트의 오 층을 매입하셨는데, 방이 두 개였다. 열다섯 평이라 우리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비좁았지만, 당시 대구에서 아파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무척 만족했다. 다만 난생처음 보는 좌변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한동안 변비를 앓았던 기억이 있다.     


  『동국이상국전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에 노극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그 집을 팔려다가 팔지 못하고 외군(外郡)에 갔었는데, 그의 아내가 낭중(郎中)인 현덕수(玄德秀)에게 백은(白銀) 12근(斤)을 받고 집을 팔았다. 극청이 돌아와서 집값을 너무 많이 받은 것을 알고 백은 3근을 가지고 덕수에게 가서 자신이 이 집을 살 때 9근을 주었고, 수년 동안 살면서 수리한 것이 없으니 3근을 돌려주며 말했다. “내가 평생 의리에 그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탐내는 짓을 하겠소? 만일 각하(閣下)가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값을 다 돌려줄 터이니, 다시 내 집을 반환하시오.” 했다. 그러자 덕수는 “내가 극청만 못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하고 그 은을 절에다 바쳤다. 나는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그 집안의 세계(世系)와 그 밖의 다른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하느냐며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노극청은 아마도 다른 고을로 출장을 다니는 직업을 가졌나 본데, 그 사이에 아내가 집을 팔아버렸다. 그런데 집값을 너무 많이 받았다며 돈을 돌려주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에도 누군가의 집이 높은 값에 팔리면 덩달아 주변의 시세도 올랐을 터, 주변 이웃이나 아내의 처지에서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겠다. 매사가 의리만 찾던 사람이었으니 아내는 그가 없는 사이에 얼른 집을 팔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옛이야기의 골자는 따로 있다. 이 이야기가 『고려사절요』에도 나오는데, 자료에 따르면 고려시대 명종 시절의 일이다. 집을 판 사람은 산원동정散員同正이라는 벼슬을 한 노극청이었고 집을 산 사람이 현덕수라는 인물인데, 내시지후內侍祗候라는 벼슬을 했다고 전한다. 산원동정은 말단 공무원이었고, 내시지후는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의 관리였다. 왕을 보좌하는 벼슬에 있던 그는 노극청에게 백은 3근을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집을 도로 물리라는 말에 그 돈을 받았고 절에다 시주해 버렸다.      


  두 사람의 의리義利를 지금에 와서 되새기는 것은 지방의 말단직 공무원과 청와대의 고위공무원이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에게 집을 판 말단 공무원이 집을 팔아서는 이익을 남기지 않겠다는 고집이나 그런 하위 공직자에게는 질 수 없다는 고위 공직자의 자존심 싸움이 대단하다. 결국 그 남는 돈은 절에 시주가 되었으니 다만 그 돈이 절에 공양을 드리러 온 백성들에게 잘 나누어졌기를 바란다.     


  『동국이상국전집』을 지은 이상국 선생은 그 집안의 내력이 궁금했는데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적었다. 당시로서도 특별한 일이었으므로 기록에 남긴다는 말과 다름없다.     

  지금은 욕실이 두 개나 있는 집에 살고 있다. 화장실에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집값이 올랐나 떨어졌나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면 한심할 따름이다. 올라도 한 채뿐인 집이니 팔 수가 없고, 떨어져도 팔고 어디로 이사할 수도 없으니 오르나 내리나 별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볼일이나 시원하게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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