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사신 세월이 반백 년을 훌쩍 넘겼다. 평생을 “저 양반을 만나서 내가 폭삭 늙었다.” 하시다가도 “어떻게 만나셨어요?”라고 물으면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먼저 지어진다. 아마도 처음 만남의 순간은 그렇게 싫지 않으셨나 보다. 시골에서 도시로 시집갈 수 있다는 희망과 잘 생기고 허우대가 멀쩡하니까 밥은 굶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는 게 어머니 말씀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버지가 중간중간에 “그건 아니고”,라며 끼어들면 “가만 좀 들어보소!” 하고는 어머니가 또 말씀을 이어가신다.
옛이야기에 어느 부부가 강비탈을 걷고 있었다. 그러자 강에서 커다란 메기 한 마리가 나타나서 신랑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메기를 막아서며 “네가 신랑을 데려가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 그러니 내가 먹고 살 것을 내놓아라.”라고 했다. 메기는 육각형의 구슬을 내주었다. 첫 면에다 대고 쌀 나와라, 하면 쌀이 나오고, 두 번째 면에다 대고 옷 나와라, 하면 옷이 나오는 구슬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 번째 면은 어떤 용도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내가 끝까지 묻자, “그것은 미운 것을 없애주는 면”이라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너 죽어라.” 하니 메기가 죽었다. 둘은 그 구슬을 가지고 잘 살았다.
아내의 기지로 잘살게 된 부부의 이야기다. 남편을 잡아먹으려는 메기에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니 메기가 육모 구슬을 준다. 그 안에서 온갖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나온다. 게다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남편을 데려가려는 메기를 물리치는 아내의 모습에서 한 가정을 지키겠다는 강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이 남편은 아내 덕에 잘 살았을 것이다.
옛이야기가 전해주는 교훈이 깊이가 너무 깊어 가끔 놀랄 때가 많다. 이야기의 시작으로 들어가 보자. “어느 부부가 강비탈을 걷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이 말은 결혼 생활이 강비탈을 걷는 것처럼 위태하다는 말이다. 어떤 구전에는 산비탈을 걷다가 짐승이나 여우를 만난다는 버전도 있다. 그만큼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으며 늘 서로 힘을 합쳐야 갈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험을 만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평평한 길을 걷고 있었다.”라고 한다면 메기나 여우가 나타날 리가 없고 위험에 빠질 리도 없다. 선조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남남이 만나서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진작에 알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요즘 노치원에 다니신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시간에 여유가 좀 있으신가 보다.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오실 시간이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걸 보면 두 분은 강비탈이나 산비탈을 잘 올라서 이제는 좀 평평한 길을 가시는 것 같다. 다만 가시는 길이 좀 오래되면 좋겠는데, 그 길이 너무 짧지는 않을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