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기력함에 빠져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논문 마무리를 앞두고 밤을 새워가며 논문 작성에 매진했다. 순수 나의 의지보다는 졸업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부여한 압박, 요 근래 제일 많이 부딪히는 동기 선생님들 모두가 논문에 매달리고 있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분위기, 학위를 받기 위해 그동안 쏟아부은 시간과 돈의 책임이 논문 작성에 몰입하게 만든 것 같다. 몰입이라는 행위가 원래 이런 걸까? 어느 정도의 목적이 달성되자 허무함과 무력함이 그동안 쏟아부었던 에너지의 자리를 대체한다. 아니면 나의 순수 의지가 아닌 외적 압력에 의해 몰입을 했기 때문에 소진된 것일까? 끊임없는 물음을 만들어 낸다.
무기력은 무미건조함을 불러오고, 무미건조함은 삶의 생생함을 앗아간다. 생생함이 사라진 삶은 더 이상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먹는 것의 즐거움은 식사라는 의미를 만들어내고, 하루의 식사 시간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든다. 그 기다림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생생함이 사라지자, 밥을 먹는 행위는 만족감이 아닌 "그냥 밥을 먹을 시간이니까"로 생동감을 잃는다. 나는 왜 생생함을 잃어버린 것일까? 왜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일까? 왜 그 무엇도 흥미를 불러오지 못할까?
최근 나의 고민을 돌아보면 삶이 너무나도 심각했다. 고독, 죽음, 공허와 같이 암울하고 무거운 주제만 떠올렸다. 그 무게가 삶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만들어 냈지만, 반대로 나를 존재의 무게에 짓눌리게 만들었다. 죽음을 떠올리는 행위는 관계의 온기, 먹는 것의 즐거움, 사소한 웃음을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행위로 만들었다. 죽음 앞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를 잃어버리니 말이다. 고독을 마주하는 행위는 희망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타인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은 고독에 처한 나의 현실을 비참하게 만들어 희망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 희망을 마주하지 않자 고독의 심연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공허함에 지고 싶지 않아 공허함을 받아들이려 하자 내 삶이 공허 그 자체가 되었다. 어찌 보면 생생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리도 심각했나? 그래봤자 한낱 인간인데, 그래봤자 얼마 살지도 못할 텐데, 어차피 죽을 건데 말이다. 죽음을 직면함으로써 삶의 생생함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철학자 흉내가 죽음에 압도된 것은 아닐까?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회피하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죽음이라는 무게에 나를 내주었나 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기 전에 어느 정도 되찾고 싶다. 진짜 한낱 인간인 것 같다. 죽음을 마주하며 삶의 생생함을 동시에 경험하려는 숭고한 의지는 신만이 가능한 것 같다. "감히 내가 신이 되려 한 것일까?"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보자. 술에 취하고, 소리를 지르고, 배를 잡고 웃으며, 눈물을 흘려보자. 때로는 머리가 빈 사람처럼 멍청해져 보자. 욕을 먹으면 어떤가? 어차피 인간인데,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 살아보자.
단편적일 수 있지만, 그동안 내가 운동에 빠져 좋은 몸에 집착하는 것이 사회적 틀에 갇힌 미숙함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틀에 갇힌 미숙함, 유행이라는 틀을 따르려는 몸부림일 수 있지만 인간다움이기도 하지 않을까?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고, 잘난 자신이 되고 싶다. 원초적인 몸의 욕망을 품었을 뿐이다. 그저 내가 가진 것에 흠뻑 취해 충분히 누려보리, 그리고 가진 것을 서서히 잃어가는 순간 홀가분하게 놓아주자. 물론 앞으로 한동안 계속해서 고민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것 같다. 다만, 오늘 떠올린 이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