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남기고 간 여운

by 청명


타인과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동안 고독이란 키워드에 몰입했었다. 물론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학교를 다니며 선생님들을 만나고 주말이면 친구들도 만났다. 다만 그러한 만남 속에서 혼자가 되는 시간들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았다. 보통은 한 주가 마무리되는 금요일 밤에 집에 홀로 있으면 몰려오는 외로움에 만날 사람을 찾았지만 정해진 약속이 없다면 의도적으로 약속을 만들지 않았다. 혼자의 시간은 제일 먼저 외로움을 불러오고 곧이어 불안이 뒤따랐다. 그 불안은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사실들을 내게 들이밀었고, 때론 힘든 시간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고요한 방에 홀로 앉아 있다 보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시작으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 가능성들에 대한 질문들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일까 비교적 부정적일 수 있고, 심오하고, 유쾌하지 않은 글들을 많이 남겼고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주변의 피드백 때문일지, 아니면 이제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싶던 것인지 나의 관심이 고독에서 만남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기존의 나의 세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려 하는 것 같다. 고독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조만간 정리해서 마무리해야겠다.

지난 주말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요즘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시작으로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지인의 집에 초대받았고, 전시회까지 다녀왔다. 기존의 주말은 카페와 운동만을 반복하던지라 만남이 만들어낸 소화되지 않은 여운들이 남는다. 이 여운들에 젖어있다 보니 타인과 관계한다는 것, 타인과 만난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피어났다. 최근 변화한 나의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존에 알고 지내던 만남이 아닌 새로운 만남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새로운 만남은 흥분과 자극을 불러온다. 어쩌면 지금까지 불만족스러웠던 나의 관계를 보상하려는 듯, 기존에 마음에 들지 않던 나의 이미지를 바꿔보려는 듯, 아니면 기존 관계들이 인정해 주지 않았던 나의 모습들을 인정받고 싶다는 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어떠한 결핍을 보상받고 싶다는 듯이 복합적이고 다양한 욕구들이 날 잔잔한 심연 속에서 건져 올린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의 만남은 내가 알지 못하는 가능성을 가진다. 가능성이란 때론 불안하다. 내 앞에 마주한 타인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난 어떻게든 그 존재를 파악하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나의 머릿속에서는 기존의 유사한 경험과, 기존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다양한 가설을 세운다.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의 표정과 말투, 대화의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난 그 사람과 관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엔 나의 욕구와 관계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처럼 노력한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는 바램이 있다는 것이고, 난 나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그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는 반응을 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참 안타까운 게 머리로는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정작 이처럼 타인과 마주할 때면 난 언제나 계산적이게 되고 만다. 그동안 혼자 있으며 어지간히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느낀다.

그런데 내가 가진 데이터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면, 나의 기존 경험을 총동원해도 반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계산을 포기하고 그냥 내 앞에 선 타인을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기존 나의 편견과 틀을 벗어난 존재와의 만남이고 또 다른 세계와 충돌하는 경험이다. (물론 완전한 편견과 틀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통하지 않더라도 살아온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은 때로 그 존재를 나의 경험의 틀에 가두려는 행위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타인 존재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타인을 나의 경험에 틀에 가두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혹은 타인을 나의 욕구에 따라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가능성을 모두 파악하려 노력한다. 마치 ”난 너를 너무나도 잘 알아“라고 외치며, 그 존재를 나의 영향력 아래 두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을 만남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남이란 상하관계가 없는, 동등한 존재로 서로를 인정하고 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주말의 만남 중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나는 마치 다른 존재를 만난 듯이 그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이 올라왔다. 물론 그 나라에 대한 편견이 있겠지만, 서로 원만하게 통하지 않는 언어로 인해 편견은 사소한 문제가 되었다. 나의 말이 그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는지, 그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내가 느낀 것이 맞는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주고받음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만남이란 무엇일지에 대한 물음을 내게 던져주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그 사람들에게 내가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욕구는 여전했다. 난 나의 존재를 그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핸드폰 번역 어플을 끊임없이 사용했고, 그런 와중에 나의 강점을 어필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이 내가 만남을 원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럴까 타인과의 만남에 더 관심이 간다.

만남 후 다시 혼자가 된 시간에는 여전히 여운이 감돈다. 이 여운은 때론 공허감이 되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운은 그 만남들이 내게 강렬했음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내가 고독에 빠져 건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을 굳이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기만일 수 있다. 스스로가 고독을 감내할 수 있다고 떵떵거리는 자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혼자가 되어 느끼는 아린 감정들, 그리운 감정들 속에 느껴지는 묘한 온기가 있다. 그것은 외로움과는 조금 다르다. 지나간 시간에 잠시 더 머물러 있고 싶은 느낌이랄까, 시리고 아리지만 묘한 온기마저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빠져 눈을 감으면 깊은 잠에 빠진다.

나의 관심사가 만남으로 옮겨갔다고 해서 엄청나게 달라진 것은 없다. 지금도 역시 홀로 방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고독이 나쁘고 만남이 좋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만남 후 다시 혼자가 되는 시간이 그 만남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다. 때론 타인에게 기대는 것도 용기이며, 결핍이 꼭 수치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내게 전하는 것 같다. 관계가 끝난 후 감도는 여운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든, 추후 만남을 약손 한 이별이든. 이렇게 돌아보니 어쩌면 난 이별이 두려워 고독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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