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윤리
우주와 우주가 충돌하는 것은 시공간의 뒤틀림이다. 그 뒤틀림의 현상은 감히 이해될 수 없다. 뒤틀림이라는 말 그대로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는 그 모든 것들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 소용돌이와 같은 경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현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뿐이다. 만약 이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 무엇을 시도한다면, 끝없는 블랙홀 속으로 모두 사라질 뿐이다. 이해는 욕망에서 온다. 형용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나의 세계에 종속시키려는 욕망이다. 만약 이 욕망에 빠진다면, 눈앞의 경이로움은 곧 모두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환상만이 남는다.
환상은 나의 어둠을 밝힐 것이라 믿는 나약함이며, 내가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겠다는 이기심이다. 야속하게도 우주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에 다른 우주를 밝힐 수 없다. 이는 마치 이미 사라져 버렸을지 모르는 밤하늘의 생명의 잔상을 통해 그 빛의 기원을 분석하는 것과 같이 느낀다. 대 우주적 차원에서 너무나도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우주의 시간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팽창한다. 우리는 어쩌면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보다 더 광활한 차원으로 팽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성립되지 않는 경이로움이자 아름다움이다. 정말로 보잘것없고, 나약하고, 사소하고,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위대함이자 숭고함이다. 이 팽창은 때론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물결로 다가오기도 한다. 감히 도전할 수 없을 것 같은, 나름 굳건히 쌓아 올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휩쓸려가는 경험.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경이롭고 숭고한 존재이기에 가능한 사건이다. 단지 난 그 숭고함을 바라보며 응원할 뿐이다.
야속하게도, 나의 우주가 재 아무리 팽창하더라도, 나의 차원을 넘어갈 수 없다. 서로의 물결은 닿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다른 차원을 살아간다. 어떤 이의 우주가 언어로 소통을 한다면, 다른 이의 우주는 빛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 또 어떤 이의 우주는 음악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우주와의 소통을 꿈꾼다면,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모든 체계와 현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가 소통의 시작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는 곧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나약함과 같다.
우주와 우주가 충돌한다는 것은 시공간의 뒤틀림이다. 시공간의 뒤틀림 속에선 모든 차원과, 경험과, 언어와, 생각과, 개념과, 신념이 형태를 잃어버린다. 그곳에 남는 것은 말 그대로 현상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우주 속에서 경험한 현상을 느끼고, 그 느낀 것을 전할 뿐이다. 현상은 정의될 수 없다. 현상 또한 나의 우주에서만이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내가 경험한 현상을 다른 우주에 건넨다는 것은 곧 또 한 번의 뒤틀림이다. 그 뒤틀림 속에서 현상은 불확실성일 뿐이다.
때문에 만남은 운명과도 같다. 절대적으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무한한 차원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시공간의 간섭과도 같다. 마치 수 십, 수 백, 수 천 번의 뒤틀림 후에 발생할, 정해진 사건처럼. 운명은 이기심과도 같다. 나의 뒤틀림을 허용하겠다는 이기심. 정해진 사건을 쟁취하겠다는 이기심. 뒤틀림은 나만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별들이, 수많은 우주들이 충돌하며 생겨나는 뒤틀림의 반복에서 마주한 이기심과도 같다.
나의 우주에서 가능한 것은 단지 물결을 같이 느끼는 것뿐이다. 그 물결이 나의 물결과 같을 수 없고, 그 물결의 정의가 나의 물결과 같을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물결의 감촉을 떠올리며, 너의 물결과 같길 기도할 뿐이다. 이는 이기심과도 같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함이다. 하지만 이보다 숭고한 나약함이 어디 있을까. 나의 우주적 차원에선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대 우주의 운명의 순서가 다가오길 바라는 이기심을 꼭 잡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