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1번 버스

기록 04

by 청명


세상의 뜨거움이 절정에 다다르던 날. 예상보다 일찍 전철에서 내린 나는. 아직 수업 시작이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사람이 없는, 빙빙 돌아서 학교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 버스의 냉기를 나 홀로 독식할 수 있다는 욕심과, 창밖의 초록이 절정으로 향하는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는 작은 위로를 안고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 정차했다. 신호에 걸린 것도 아니고, 버스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내겐 멈춤의 이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새벽 5시 30분에 눈을 뜨고, 짐처럼 여겨지는 직장인의 하루를 살아낸 내게는 ‘여백’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앞 문이 열렸다. 한 할머니가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버스에 오르셨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버스 요금을 내지 않고 제일 앞자리에 앉는 상황이 내 시선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50분까지 나오라니까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는 버스 기사님을 향해 “저녁을 먹느라..” 힘 없이 대답하는 할머니를 보았다. 앞 문이 닫히고, 다시 버스가 출발했지만 기사님의 구박은 좀처럼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께선 구박을 멈추지 않는 기사님을 향해 물방울이 맺힌 페트병을 건네셨다. 아무리 맨 앞자리라 하더라도,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에게, 기다린 만큼 엑셀을 밟는 버스 위에선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아들과의 거리였다. 시원한 물을 들이킨 후에야 아들의 구박은 멈췄다. 난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그날의 더위, 창밖에 펼쳐진 초록의 나무들, 버스가 멈춰있던 시간, 내 눈앞에 제일 먼저 들어온 지팡이. 기사님의 언성, 세상에서 가장 시원해 보이는 페트병.

나는 그날 바로 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24년 여름의 기록.

작가의 이전글바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