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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이지상 Mar 09. 2019

오키나와 모노레일에서는 휴대폰을 끄세요

이얏사사, 이얏사사...(오키나와 나하에서)

     

 인천 하늘로 비행기가 솟구쳤다. 파란 상공이 반갑다. 저가 항공이라 좌석 사이가 좁지만 다리가 짧은 나는 괜찮다. 수없이 비행기를 탔지만 탈 때마다 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창밑으로 파란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태평양으로 진입한 것 같다. 가이드북을 꺼내 아기자기한 오키나와 섬들을 본다. 오키나와 본섬과 이시가키 섬이 있는 야에야마 제도 등이 앙증맞다. 아주 작은 섬들이다. 


일본 오키나와 지도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지도에서 보면 오키나와는 도쿄보다 서울에서 조금 더 가깝다. 

(지금 이 지도는 후쿠시마와 비교하는 것인데, 도쿄를 기준으로 해서 보아도)


그리고 오키나와라 표시된 본섬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흐릿해보이는 야에야마 제도의 섬들은 일본 본토보다 타이완 쪽에 훨씬 가깝다. 일본인들에게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세계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도 않다. 인천에서 오키나와 본섬 나하 공항까지는 2시간 20분밖에 안 걸린다. 머릿속 지도에서는 멀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이웃 마을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지도에서 보면 왠지 오키나와는 일본과 타이완 그리고 태평양의 분위기가 섞일 것 같은 분위기 아닌가?

정말 그렇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해 있지만 어딘지 좀 다르다. (나중에 여기 있었던 류큐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세하게 소개할 것이다. )



 어느새 나하 상공에 진입했다. 비행기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활주로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두 번째 오지만 여전히 차분한 분위기의 공항이다. 입국 수속을 밟는데 이민국 직원이 내 여권을 만지작거리다 일본어로 물었다.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조금밖에”

 “3개월 전에 오키나와에 왔었는데 왜 또 왔지요?”

 이번에는 영어로 물었다.

 “전번에는 조카와 함께 여행했고 이번에는 혼자 여행하는 겁니다.”

 “조카가 오키나와에서 살아요?”

 “아뇨, 서울에.”

 “얼마 동안 일본에 있을 겁니까? 세 달이요?”

 “아뇨, 2주일이요.” (하지만 앞으로 이웃집 드나들 듯이 들락날락할지도 몰라요.)

 이민국 직원은 의심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다 도장을 쿵 찍었다. 공항을 빠져나오기 전, 관광 안내 센터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이 좀 이상했나? 슬그머니 경찰이 따라붙었다. 구석에서 점퍼를 벗어 배낭에 넣는데 경찰이 옆을 지나는 척하면서 힐끗 보았다. 문득 스파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기 전,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사 마셨다. 천천히 커피를 음미하며 숨을 골랐다. 내 바쁜 삶에 복수라도 하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니 5월의 후텁지근 공기가 덮쳐 왔다. 2층을 통해 국내선 공항으로 가도 되지만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2, 3백 미터 정도 떨어진 국내선 공항은 국제선보다 더 번잡했다. 일본 국내 관광객들이 훨씬 많이 오기 때문이다. 배가 출출해서 우선 오키나와 소바를 한 그릇 먹었다. 구수한 국물을 마시며 오키나와에 다시 왔음을 실감했다. 면세점을 천천히 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뭘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어떤 장소든 후다닥, 허겁지겁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왔던 승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 국내선 공항과 통로로 이어진 모노레일 역으로 갔다. 플랫폼은 한적했다. 그 한적함에 다시 긴장이 풀렸다. 두 량짜리 장난감 같은 모노레일이 왔다. 많지 않은 승객을 태운 모노레일은 조용히 공중으로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갔다. 





 몇 정거장을 지나면서 승객들이 탔지만 조용하다. 전번에 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세상도 있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최우선석, 즉 경로석 근처에 있을 때는 휴대폰 전원을 꺼달라는 글이 써져 있었다. 다른 자리에서도 통화를 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중국 관광객들만 어쩌다 했을 뿐. 

 조용하다. 이런 분위기가 감동적으로 좋아진다. 서울의 지하철 안에서 온갖 비즈니스를 이야기하고, 가정사를 떠들고,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를 크게 틀어 놓은 노인들, 혹은 사람들 앞에서 서로 끌어안고 비벼대는 젊은 남녀들... 이런 풍경이 먼 나라의 풍경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조용하고 편안한 세상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만 지켜져도 사람은 살만한 것이다.  퇴근 시간이라 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모두 소곤거린다. 기분 좋은 소음들이다. 의미를 모르는 소리는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상쾌하다. 호기심 어린 눈빛, 벙긋거리는 입가의 미소, 하얀 이빨들이 눈부시다. 창밖에 걸린 하늘이 희끄무레하다. 어느새 가는 비가 뿌려지고 있다. 흐릿한 세상이 반갑다. 다시 오키나와에 왔구나.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국제거리 근처의 일본식 여관에 가니 3개월 전의 그가 앉아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왔다던 중년 사내였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잘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리상, 리상’ 하며 불렀다. 고마웠다. 그는 싱글싱글 잘 웃었지만 어딘지 타향살이를 하는 사내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가 준 방은 전번에 조카와 함께 묵었던 방이었다. 눅눅한 다다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어디선가 조카가 ‘큰 아빠!’를 부르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짐을 푼 후,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처럼 거리를 걸었다. 모든 게 몇 달 전의 풍경 그대로였다. 블루실 아이스크림 집, 쇼핑 몰 해피 나하, 스타벅스 그리고 대각선 건너편의 헤이와 도리 상점가 앞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딱히 구경할 것은 없었다. 그냥 걸었다. 뭘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시간들. 이런 것이 두 번째 여행의 묘미다.


(국제거리, 헤이와 도리 상점가)


(헤이와 도리 상점가 내부)

(식당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여인. 여인은 자기가 입은 옷이 일본 기모노와는 조금 다른 오키나와 전통 복장이라고 말했다.) 



(오키나와 국제거리의 밤 풍경)


(오키나와에서 유명한 블루 실 아이스크림집)

(우치난추, 즉 오키나와 현지인이라고 말하던 소녀. 선하고 친절했던 학생은 쉬는 시간이면 열심히 책을 보며 공부를 했다.  그런데 나는 우치난추와 야마톤추, 즉 일본 본토인을 쉽게 구별할 수는 없었다.)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스피커에서 반복되는 흥겨운 블루실 아이스크림 씨엠송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조카와 여기서 아이스크림을 먹었었는데 벌써 3개월이 지났구나. 3년도, 30년도 훌쩍 지나갈 것이다. 조카가 내 나이쯤 되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 혹시라도 이곳에 오면 그때 그 순간들이 생각날까? 돌아가신 부모님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이 들어갈수록 과거가 꿈처럼 보인다.



 자색 고구마 반죽을 얹은 오키나와 특산물인 베니이모 타르트를 한 상자 산 후, 어느 라멘집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 정도인데 한국 사람들 몇 명이 들어와 있다. 처음 온 사람들인 듯 흥분 속에서 떠들썩했다. 구석에 앉아 돼지고기가 들어간 매콤하고 짭짤한 라멘을 먹었다. 거의 모든 음식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입과 위장은 여행을 편하게 해 준다.

 

 마트에서 아사히 드라이 알코올 0%인 무알콜 맥주를 샀다. 간이 안 좋아서 잠시 술을 금하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기분을 내야지. 점원에게 그런 게 있냐고 물어보니 ‘오, 알코오르 제로오 뻐센트’ 하며 혀를 굴리는 인도 혹은 방글라데시인 종업원이 친근했다. 그리고 고야찬푸르 도시락을 쌌다. 고야는 여주를 말한다. 약간 쓰지만 웰빙 푸드다. 




 여관으로 들어온 나는 퇴근한 직장인처럼 속옷을 빨아 방안에 널고, 에어컨에 코인 300엔을 넣어 ‘드라이’에 맞춘 후, 베니이모 타르트와 고야 찬푸르 도시락에 짝퉁 맥주를 마셨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근처 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전통 악기 ‘산신’ 소리도 들려왔다. 이얏사사, 이얏사사……흥겨운 추임새 소리 따라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 문득, 1930년대 먼 타국 땅에 징용 온 조선인이 되어 버린다. 나는 고향 잃은 식민지 시절의 조선인처럼, 숨을 낮춘 채 글을 적었다. 편안하다. 차차 현실 속의 시간과 공간을 떠난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주범들이다. 글을 쓰며 만들어가는 비시간, 비공간의 세계는 아무도 침범 못하는 나의 세계. 이불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기를 쓴다. 쓴다는 것은 현실 속의 파도를 밀어내는 행위다. 모니터 속으로 들어가면 어디로든 달리고, 날아갈 수 있는 비시간, 비공간의 세계가 펼쳐진다.

 행복하다.  두두두둑. 옥상의 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흥겨웠다. 어느새 새소리, 음악 소리가 끊겼고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로운 세상인 줄 알았더니 누가 아픈가? 사고가 났나? 밤 12시가 이미 넘었다. 창문을 여니 비바람이 들이쳤다. 5월 초, 살짝 후텁지근한 장마 바람이 푸근했다. 


 비 오는 오키나와도 좋았다. 아늑하다. 떠나기 전의 우울감이 12시간도 안 돼 날아가 버렸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여관에서 일하는 중년 사내, 라멘집 여인, 블루실 아이스크림 집 소녀 그리고 마트에 일하는 사내와 웃으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거리를 걸었고, 짙어지는 어둠 속의 행인들을 바라보았을 뿐. 그 외에 라멘과 아이스크림과 베니이모 타르트와 짝퉁 맥주를 마신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도 마음이 푸근하고 촉촉해졌을까? 어항 속에 갇혀 있던 물고기가 바다에 방생된 느낌. 여행 나오길 잘했다. 비가 오면 어떤가? 바빠도 가끔 빈둥거려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이것과 관련된 팟빵 육성 방송은 아래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 다른 분위기입니다.


http://www.podbbang.com/ch/1770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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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읽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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