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과열된 현대인에게 다시 필요한 독서
가끔 나의 세계를 넓혀주고 살아가는데 힘을 준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물론 여행이 큰 영향을 주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곳을 여행하며 낡은 껍질이 깨지고 더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높은 인격과 더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여행의 경험은 그것을 선망하는 사람들 앞에서만 빛나 보였지 현실 세계의 풍랑들, 즉 관계에서 오는 갈등, 돈, 늙음과 쓸쓸함, 병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허약했다.
나만 그럴까? 여행자가 이토록 많은 시대인데도 사람들의 인격은 더 고상해지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더 까칠해지고 불안해지고 속이 좁아져 간다. 여행이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실체가 모호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의 관계에서 파악되는 ‘나’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여행을 벗어난 전체 삶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때 나는 ‘길에서 다 배웠다’라는 건방진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것이 여지없이 깨진 것은 중년부터였다.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나는 너무도 허약했고, 이런저런 병들을 앓는 가운데 조금씩 무너져 갔다. 경제적인 문제 앞에서 궁색한 인간이 되어 갔고,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실수한 적도 많았다. 또한 닥쳐오는 고령화 시대를 바라보며 우울했다.
이제 어디로 탈출해야 하나? 정신없이 여행과 글 속에 파묻혀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 사춘기 시절의 ‘내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가’라는 의문이 뼈가 시리게 다가왔다. 극복된 줄 알았던 고민들이 다시 머리를 들고 있었다.
산 넘어 뭔가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안고 산을 넘었고, 강 건너 뭔가 있을 것 같은 꿈을 안고 강을 건넜다. 그곳 어디쯤엔가 있을 튼튼한 성채로 들어가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산 넘어 산이고, 강 건너 강이며 인생이란 그렇게 끝없이 길을 가는 것이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막막하고 허망했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그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년의 독서는 청년 시절 벌려 놓았던 지식과 경험을 차곡차곡 수확하는 행위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책을 통해 성장해왔다. 어린 시절에는 만화책, 동화책들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고민이 많던 청소년기에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나의 세계를 넓혀 주었다. 책을 통해 나는 세상을 배웠고 여행의 꿈도 키워 왔다.
내가 보는 게 다가 아니고, 내가 듣는 게 다가 아님을 가르쳐 준 것은 책이었다. 또한 수많은 고통과 갈등이야말로 내 삶을 더 튼실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며 위로해주는 것도 책이었다.
이 책에서 다룬 책들은 어떤 기획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다. 철학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논픽션도 있다. 굳이 주제를 잡자면 내 삶의 고비를 넘기는데 도움을 준 책들이다.
어느 날 삼성동에 있는 ‘별마당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책이 가득히 채워진 거대한 서고들이 우뚝우뚝 솟은 멋진 곳이었다. 도서관 2층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밑으로 시원스럽게 트인 공간을 바라보니 저녁나절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그 풍경을 바라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서고가 성스럽게 보여 경배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저 수많은 책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삶을 바쳤으며, 저것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출판인들이 수고를 했을까? 인류의 정신이 그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음악이 책들의 은밀한 합창처럼 느껴지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책을 통해 이제 다른 세계로 걸어 나간다. 드넓은 벌판에 아름다운 나무들이 가득하고, 그 사이로 멋진 길이 뻗어 나가고 있다. 나무마다 인류의 지혜와 상상으로 맺어진 알록달록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중년의 고개를 넘자 내리막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천만에, 풍성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책 덕분이다. 책을 통해 닫힌 세상, 뻔한 세상, 피곤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한다. 앞서간 인간들의 정신을 만나러 간다. 새로운 우주다. 책이 고맙다. 이제 다시 책이다.
(이지상의 '중년 독서' 서문에서)
텍스트
1. 강상중 저, 송태욱 역, 『도쿄 산책자』, 사계절, 2013
2. 후지와라 신야 저, 김욱 역, 『황천의 개』, 청어람 미디어, 2009
3. 오쿠다 히데오 저, 양윤옥 역, 『남쪽으로 튀어』, 은행나무, 2008
4. 알베르 카뮈 저, 김화영 역, 『이방인』, 책세상, 2010
알베르 카뮈 저, 김화영 역, 『시지프 신화』, 책세상, 2006
5. 빅터 프랭클 저, 이시형 역,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 출판사, 2007
6. 헤르만 헤세 저, 박병덕 역, 『싯다르타』, 민음사, 1997
7, 프란츠 카프카 저, 김현성 역, 『심판』, 문예출판사, 2010
8. 에밀 아자르 저, 용경식 역,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2003
9.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 김윤진 역, 『인간의 대지: 인간의 대지, 야간비행』, 시공사, 2014
10. 오르한 파묵 저, 이난아 역,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 민음사, 2008
11. 김승옥 저, 『무진기행』, 문학동네, 2004
12. 린다 리밍 저, 송영화 역, 『부탄과 결혼하다』, 미다스북스, 2011
13. 윌리엄 서머싯 몸, 송무 역, 『달과 6펜스』, 민음사
14. 레나 모제 저, 이주영 역, 〈인간 증발〉, 책세상, 2017
15. 조나단 스위프트 저, 류경희 역, 『걸리버 여행기』, 미래사, 2003
16. 플라톤 저, 최명관 역,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도서출판 창, 2015
17. 아리스토텔레스 저,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역, 『니코마코스 윤리학』, 길, 2015
18. 미하엘 엔데 저, 한미희 역, 『모모』, 비룡소, 2017
19. 오정희, 『중국인 거리』, 문학동네, 문학과 지성사???-제가 직접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확인 필요.
20.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 김양미 역,『빨간 머리 앤』, 인디고(글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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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출간한 책 '중년 독서'를 돌아보면서 삶과 책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중년이 어디까지일까? 애매하다. 옛날 기준으로 보면 40대만 넘어도 중년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50대, 60대가 되어도 청년 기분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고령화 사회니까.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40 넘으면 이제 몸의 노화가 진행된다고 한다. 아마 하루하루가 다를 것이다. 마음은 30대지만 몸은 50대로 가니까, 점점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여기서 다룬 주제들은 꼭 중년만 부딪치는 문제들은 아니다. 직업, 진로, 병, 죽음, 노화... 등 아무 때고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다. 살면 살수록 '리얼 라이프'의 무시무시한 면을 보게 된다. 내가 그랬다.
여행 많이 하면 멘털이 강해지고 단단한 내공으로 그까짓 것 다 극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병, 병간호, 죽음, 생활고... 이런 것 닥치고 보니 허약했다. 삶은 만만치 않았다. 그때 다시 숨을 가다듬고 정신적 무장을 하게 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이미 앞서간 선배들이 피로 쓴 글들이 있었다.
그런데 중년들은 책을 안 읽는다. 시간도 없고 눈도 아프다. 에너지를 사느라 다 써서 힘도 빠진다.
사실은 가장 책을 읽을만한 때인데. 또한 젊은이들은 자기 책이 아니라고 안 읽는다. 사실 다 필요한 건데.
그래서 시간 없고 힘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 쓴 책이 '중년 독서'다. 알기 쉽게 소개하고, 나의 체험을 섞어서 '삶의 고비'를 넘기는데 도움을 주는 책들을 소개했었다. 이 책 한 권 읽으면 책 20권 아니, 약 30권을 읽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취지로.
그런데 그 책 자체를 안 읽는 시대다. 그래도 보람은 있다. 우선 내가 책 읽기를 통해 고비를 넘겼고,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또 힘을 얻었으니까.
합리적 이성이 휩쓸었던 근대에, 억눌렸던 상상력과 시학의 세계를 복원한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진정한 문학은 두 번째 독서에 있다’고 말한다. 첫 번 째 인상이 지나가고 난 후, 천천히 다시 읽을 때 작품과 자기 내면이 만나는 공감대가 넓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작품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모티프를 담고 있는 소중한 텍스트였다. 독서는 작품이라는 수수께끼를 해석하는 행위가 아니라, 독자가 작품으로부터 자극받은 후 스스로 떠나는 몽상의 길과 같은 행위이며, 작가와 독자는 상상력 속에서 동일한 꿈을 뒤쫓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체험을 통해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책을 읽는 동안 가끔 내 안에서 불꽃이 인다. 작품과 내 삶의 체험이 만나는 그 순간은 ‘두 번째’ 읽을 때 번쩍이는 번개처럼 드러났다. 첫 번 째 읽을 때는 내용을 쫒아가느라 바쁘다. 어려운 내용일 때는 버겁기도 하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여유를 갖고 천천히 다시 읽을 때 전에 몰랐던 것들이 알아지고 더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가끔 너무 어려울 때는 필사를 했다. 자판기를 치며 두 번째 읽다 보면 신기하게도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시절에 접했던 책들을 중년에 다시 보니 어찌나 이해가 잘 되던지… 중년 독서는 마치 두 번째 독서처럼 내 삶을 다시 보게 해 주었다. 책을 통해 나는 위로받았고 조금씩 어린 시절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사진과 영상이 휩쓰는 시대다. 인터넷과 결합된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지배한다. 상상력을 자극했던 그 세계가 이제 오히려 상상력의 세계를 억압한다. 이미지가 너무 분명하고 너무 강렬하면 오히려 상상력이 위축된다. 또한 빠른 속도 속에서 금세 휩쓸리고 획일화된다. 개성이 가득한 세계 같지만 차별성이 이내 사라지는 밋밋한 세계다.
반면에 글자는 이미지가 분명하지 못하고 모호하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천 사람이 읽으면 천 개의 이미지와 상상이 피어오른다. 읽는 사람의 경험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 때 나는 글을 싫어했었다. 개념과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우회적으로 인식하는 불완전한 기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불완전성과 모호함을 사랑한다. 그곳에서 상상의 세계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진정으로 글과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 많은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엄청나게 많은 책이 나오는 이 시대에 ‘많음’을 지향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여행을 많이 했다고 항상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책을 많이 읽었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또 급히 읽다 보면 오독이 생기고 재미가 사라진다. 물론 속독으로 읽을 책들도 있지만 인연 닿는 대로, 마음 끌리는 대로 천천히 읽는 책이야말로 기쁨을 준다. 책 속에 푹 빠져 자신을 잊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읽기에서 자기 삶과 공명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책이 컴퓨터와 휴대폰에 밀려 죽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책이 사랑스럽다. 사랑하면 같이 죽어도 좋은 것이다. 한 시절, 책과 사랑하다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책이 쉽게 죽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책을 써야 한다는 각오를 늘 다지고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다룬 그 외의 참고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중년 독서'에는 아래 책들에서 언급한 메시지, 핵심들이 녹아들어 있다.
2. 후지와라 신야, 『황천의 개』에서 언급된 참고문헌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양억관 역, 『언더그라운드』, 열림원, 2002
3. 남쪽으로 튀어
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5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토르 E 프랑클 저, 박현용 역,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조셉 캠벨, 빌 모이 아스 저, 이윤기 역, 『신화의 힘』, 고려원, 1992
7. 심판
미셸 세르, 이규현 역, 『헤르메스』, 민음사, 2009
쇠렌 키르케고르 저, 임규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한길사, 2007
9, 야간비행, 인간의 대지
생 텍쥐페리 저, 배영란 역, 『성채』, 현대문화센터, 2010채
13. 달과 6펜스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저, 하지은 역, 『고갱,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 2009
폴 고갱 저, 김수자 감역, 남진현 역, 『고갱의 타히티 기행(Noa Noa)』, 서해문집, 1999
16. 소크라테스의 변론
아리스토파네스 저, 천병희 역,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 구름』, 도서출판 숲, 2010
크세노폰 저, 최혁순 역, 『소크라테스의 회상』, 종합 출판, 범우(주), 2015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 2006
베터니 휴즈 저, 강경이 역, 『아테네의 변명』, 옥당,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