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by 이준서

서울대학교 2025-여름학기 교육철학 및 교육사 기말 에세이

<한 사람과 만인을 포용하기 위해>



1. 한 사람


나는 남들보다 비세속적인 생각에 자주 빠지는 것 같은데, 그 생각을 글로 옮기다보면 항상 글이 어지럽기도 하고, 괜히 억지로 결론을 내려고 하다가 '이게 무슨 맘에도 없는 소리야?' 하기도 하고, 그냥 '모르겠다' 라고 끝낼 때가 많다. 젊기에 당연하고, 인간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남들보다 심하게 ‘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편이다.

사춘기 이후부터 실존적인 질문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대학교 2학년때까지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와 같이 개인적인 삶과 결부된 고민을 하며 전공 전문성을 쌓아왔다. 대학교 3학년 이후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을 품어 물리가 아닌 인문학과 예술을 전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를 수행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글쓰기에 진심이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결핍이라는 주제의식을 관통한다. 나는 나의 결팝과 타인의 결핍 양자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존재론적인 결핍이 타자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그런 철학적인 논의를 떠나, 내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누군가의 우울의 근원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나는 한평생 교육자라는 이름을 빌리고 싶다. 어쩌면, 교육의 이름을 빌려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일 수 있겠다. 이는 학교 현장에 근무하는 교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스승으로서 남고싶다는 열망이다. 또한, 청춘이라는 지금 이 시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기에 연민의 감정을 품을 수 있다. 청춘-나는 형언할 수 없는, 누군가의 따스한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불안을 겪는다.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쌓아 올린다. 하지만, 이 쌓아올린 답들의 엉성함을 발견하고, 위태로움을 느낀다. 남의 연민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에 본질적으로 고독한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고독함은 누구도 암호를 알지 못하는 자물쇠로 잠겨있다.

‘나는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실존주의자로서의 나는 한 평생 짊어지고 갈 문제이다. 하지만, 이공계 계열의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과 예술을 깊게 공부하고 있는 이유는 이에 대해 ‘꽤 괜찮은 답’을 내리고, 누군가에게 그럴싸한 조언을 내리고 싶다는 욕망이 근저에 있다. 절대적으로 선한 교사가 될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많은 학생들에게 어른으로 남고싶다는 뜻이다. 인간은 ‘무’에서 탄생해 ‘무’로 나아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를 기투하는 존재라 생각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무언가 창발적인 현상을 발견하고, 기록하고, 재현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글을 쓴다. 만약 학생이 삶에 대한 공허함을, 허망함을 느낀다면 나(스승)라는 표본을 통해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의에서 독해한 텍스트 중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교육 실천과 거리가 가장 멀어보인다는 생각을 많은 수강생들끼리 공유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텍스트를 통해 교육관에 대한 재고를 가장 많이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 고등학생 때의 나를 마주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건네주고 싶을지 고민해봤다. 과거의 나는 스스로를 향해 가시가 돋아있어 어떤 구체적인 조언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실존적인 물음에 대해 스스로의 관념을 통해서만 답을 내리는 것 만이 진정한 ‘자유인’이라 생각했기에 모범이 되는 존재로서의 스승을 거부했다. 그 당시 나는 주체적인 삶을 꿈꾸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빈번히 좌절했다. 삶을 살아가는 법에 정답은 없다지만, 그 정답 없음이 내 무지함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나에게 ‘무지함을 미숙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학문을 하든, 일상을 살든 우리는 항상 무지라는 괴물과 신념이라는 연약하고 무해해보이는 작은 생명체를 곁에 둔다. 사랑스러운 신념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신념의 눈을 가리기도 하고 작은 울타리를 마련해 지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신념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억압과 같은 방어기제로 드러나는게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성인이 된 뒤 가시돋아있던 과거의 나를 반추하며, 치열한 고민 속 잔재된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인간은 ‘내가 지금 무엇을 알고있고, 무엇을 모르는가’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한편, 보다 고차원적인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무지를 통해 답을 얻는 것 같다. 스승에게 초인(의지를 통한 살아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한 계보를 기록해볼 때 대부분은 ‘무지함’에서 얻어낸 가치를 통해 살아졌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무지함을 긍정적으로 내비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사유를 극단적인 예시를 통해 보이고자 한게 아닐까.


2. 두 사람, 세계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아포리즘을 좋아한다. 나라는 사람의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결국 사람의 본질은 같다고까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5주 동안 조원들과 강의시간에 나눈 대화는 대부분 피상적이었다. 하지만, 대화가 아닌 그들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무언갈 배웠음은 확실하다. 철학과 출신의 조원은 내 신념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사고를 하신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윤리교육과 대학원을 다니며 윤리란 무엇인가를 깊이 사유한다는 점은 한 주제에 대해 상반되는 주장이 모두 옳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또, 미술을 전공하는 조원이 얘기하는 교육에 대한 관점도 흥미로웠다. 흰 도화지에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교육이라는 가치관을 지니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통칭하면, 이들의 교육관은 자신의 삶에 빗대어 형성됐다. 모두의 삶이 다르기에, 미래 교사들의 교육관 또한 모두 다르고 이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좋은 교사의 소양일 수 있겠다.

조원뿐만 아니라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깊은 사유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에세이는 교육철학이라는 무대위의 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대를 마련해주신 교수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갖고 있다. 교수님과 주고받았던 메일을 다시 읽어보았다. 상처받은 마음이 아물기전에 (다소 당돌하게) 교수님께 사랑이 무엇인지 여쭤본 메일을 읽다 오그라들어 인터넷 창을 닫기도 했다. 메일을 받고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메일을 드렸어야 됐는데, 그렇지 못했던 미숙한 나를 발견했다.

글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내가 글쓰기에 대해 갖는 애정을 늘어놓아본다. 메일을 받은 당일 술을 마시며 썼던 글의 일부이다. “어쩌면, 나는 여러 생각의 먹구름이 저라는 별을 뒤덮는 기분이 듭니다. 자연적인 현상이라지만 저만이 낼 수 있는 빛이 타자에 의해 가려진다는 사실이 허무를 불어일으킵니다. 나는, 나는 무얼 위해 살고있는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데, 사랑하는 것이 나를 배반하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이 문단에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랑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이뤄졌기 때문이 아닌, 나에 대한 피로감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식으로 살아있는 흔적을 글에 남긴다.
공책에 메모하는 습관도 갖고 있는데, 볼펜을 쓰다보면 가끔 살아있음의 감각이 손 끝에도 느껴진다. 나는 글쓰기가 ‘놀이’라 생각한다. 교육철학적 맥락으로 듀이는 놀이와 일의 차이를 제시하며 과정으로서의 놀이를 강조했다. 나는 삶이란 과정에 놓여있고, 이를 글이라는 놀이수단을 통해 풀어내길 좋아한다.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던 것들을 쓰기 위해, 글에 대한 나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나는 교수님과 인간적인 소통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에 앞서 교수님, 내지는 참된 스승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다.) 나는 스승이라는 존재에 대해 삶을, 야심찬 이상과 미래를 투영한다. 심리적으로 나 자신이 되고자하는 인간상의 원형을 외부-스승에 투사하는 것이다. 덕분에 실존에 대한 증명이 이뤄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혹은, 존재의 승인. ‘이방인으로서의 나’가 환대받을 수 있다는 행복에 도취된다.

그렇기에, 나도 좋은 스승이 되고싶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다. 남의 고민을 경청하는 법에 대해 항상 배우려 한다거나, 블로그를 운영하며 가끔 찾아오는 실존적 고민을 댓글로 달아주는 사람들에게 장문의 답을 해주느라 시간을 쓴다. 실존적 물음이 사랑의 차원에서 답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생활 방식이다. 교수님의 환대 덕에 예술과 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사람에겐 누구나 탐미주의적인 면이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성을 세상 밖으로 표출해내는 것이 좋은 삶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억압당한다면, 미추(美醜)의 경계가 흐려져 내면의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학생의 예술성을 존중하고 예술적 역량을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교사는 자신의 예술적인 면을 인지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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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외로운 이들> 에드바르 뭉크, 1890

나는 뭉크의 <두 사람>을 본다. 남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두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모습은 허망하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응시하게 될 것이다. 서로의 심장을 쓰다듬으며, 그 안에 담긴 세계의 따스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주고받는 사랑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서로의 소우주를 유영하며, 인간이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 때, 단조로운 색채의 <두 사람>에 파스텔 색감이 덧칠될 것이다. ‘너와 나’라는 무대가 세계라는 무대와 동일화 되는 과정이다.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사랑하다보면 한계를 초월했다는 어떤 감각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학생을 사랑하다보면 언젠가 만인의 교사로서의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실천은 사랑을 통해, 교육이론은 사랑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Lettre à D)



영원히 누군가의 스승이자 제자로 남을 나에게. 몰아치는 위태로움 속 사랑을 잊게 되는 것은 곧 나를 잃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여전히 누군가의 스승이자 제자로 남고 싶어서. 뭔지 모를 사랑에 집착하는 이 젊은 날의 내가 앞으로도 영원하길 바래서. 이 에세이를 사랑으로 마무리하며 편지지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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