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엔 많은 모서리가 숨겨져 있다
양 한마리를 껴입고서야
모서리를 본다
보풀이 일어나야 사는 것도 있다
달과 부들이 그렇고
사마귀알집과 누에도 그렇다
보풀은 지구에서만 자라는 풀
마찰이 있는 곳에서만 돋는 풀
늙으면 가장 먼저 발뒤꿈치에 핀다는 풀
죽음이 스치는 동안 피는 꽃
너와 나
이소연, 『콜리플라워』 중 <보풀> 일부 발췌
시요일에 3월 12일 수록된 '오늘의 시'
오늘의 시,보풀에 대하여, 보풀이 무엇의 모서리인지, 누구의 자라남인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마침 오늘은 지인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연락을 보낼 수 있는 하루, 그것 만으로 꽤 특별한 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과해도 나쁘지 않은 것들, 덜어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우정, 축하, 감사, 측은지심 등.
감사한 마음과 감사의 표현은 꼭 동등하지만은 않다. 감사한 마음이 담기지 않은 표현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감사의 표현을 전할 때면 항상 감사의 마음을 담으려 노력한다. 가령, 생일 축하의 경우에도, "생일 축하해-!"라는 짧은 메시지를 입력하는 순간 만큼은 진심으로 축하한 마음을 갖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태어남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다 알지 못하지만, 또 살아간다는 것이 네게 어떤 무게일지 다 알지 못해 조심스러우면서도, 너라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된 시초의 날이니 기쁘게 축하한다는 말을 더해봐.
좋아하는 y누나에게 이런 연락을 받았을 때 든 생각은, 타인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이 꽤 기념적인, 동시에 감격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받은 사랑이 충만하게 느껴지기에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해져야한다.
전 날에 우리 과 개강파티에서 꽤 오랫동안 술을 마셨기에 붓기를 빼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탄다. 20분 정도, 시속 12킬로미터로 달리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오늘은 동아리 OT와 뒤풀이를 하는 날.
*
낯선 사람을 마주한다. 낯섦과 설레임, 생경함과 포근함. 구분 짓지 않아도 될 느낌들.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어느덧 술자리의 분위기에 익숙해 지는 순간은 항상 새롭게만 느껴진다. 새로운 얼굴을 마주할 때 마다 마음 한 켠에 피어나는 보풀.
술을 마신다. 술잔엔 웃음이, 눈물이 피어난다. 누군가의 피가 섞이기도 한다. 이 피는 우리가 광활한 지구라는 땅에서,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나라에 태어나, 동일한 언어로 얘기할 수 있다는 감격스러운 사실이 담겨있다. 피는 얼룩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장미처럼 피어나길 반복할 뿐이다.
새로운 얼굴을 익히는 순간에 담긴 우연성, '너라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된 시초의 날이니 기쁘게 축하한다는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는 순간. 얼굴에서 눈으로, 눈에서 얼굴로 진자 운동처럼 왕복하는 진솔함.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얼굴의 현현은 일종의 윤리적 호소이다. 얼굴은 나에게 명령하는 힘으로 다가온다. 이 힘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서 오는 힘이다.
- 레비나스, 타인의 얼굴, 강영안(역), 문학과 지성사, 35쪽
시 <보풀>의 보풀을 낯섦으로, 풀을 낯(얼굴이라는 순 우리말)으로 바꿔 읽어보아도 꽤 어색하지가 않다.
낯섦이 일어나야 사는 것도 있다
달과 부들이 그렇고
사마귀알집과 누에도 그렇다
낯섦은 지구에서만 자라는 얼굴
마찰이 있는 곳에서만 돋는 얼굴
늙으면 가장 먼저 발뒤꿈치에 핀다는 얼굴
죽음이 스치는 동안 피는 얼굴
너와 나
얼굴에서 보풀을 발견한 날. 보풀은 민들레꽃처럼 새하얀 구름 맡을 떠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우리의 귀에 내려앉아 간지러움을 태우기도 하겠지. 무해한 보풀을 보는 시선엔 증오 없이 오직 사랑만이 담겨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