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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 디자이너 Oct 13. 2022

퇴사 후 되어지는 인생.

내가 만나는 하나님

상반기에 휴먼브랜드를 위한 회고록을 쓰다가 묵상을 글로 써보라고 권민 대표님이 지나가는 말로 하셨던 것 같다. 이 말이 다시 귓가에 들리는 이 시점. 


내가 만나는 창조자를 글로 쓴다는 것  내 느낌과 감정이 맞을까? 내게 사인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맞을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이런 수준의 질문을 던졌던 나는 신앙심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에 대한 표현을 해보고 살지 않았었던.  내 마음을 쓰고자 하는 것도 남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 연약함. 

성경도 모르면서 내가 무슨 묵상을 한단 말인가, 그랬다. 


나의 신앙 멘토 배실장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해주셨다. 

"하나님을 우리는 직접 만날 수는 없어, 그래서 성령님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우릴 위해 일하시는 거야."



작년 12월에 새벽기도를 나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이 들어왔다. 생각이 들어왔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냥 마음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부모님 두 분의 장례를 치르고 훅 빠져나간 듯한 이 마음을 붙잡을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제 뭘 해야 하나, 내 미래에 대한 불안도 함께. 

새벽기도는 거대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 계발의 모닝 기상을 하듯 시작했다. 처음엔 초심자였던 나를 응원해주시며 교회 사모님이 한 달 동안 모닝콜을 해주셨다. 한 달을 해보니 혼자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기도 한 달을 나가고 21년 11월 28일 처음 마음으로 우러나온  십일조를 했다. 사모님께도 감사했다고 선물을 드렸다. 하지만 웬걸,,,,,,그다음 주부터 내 마음에 '추워서, 눈이 와서, 어두워서, 무서워서 못 걸어가겠다'는 둥 가지 말아야 할 핑계들이 자꾸 들어오는 걸 느꼈다. 윗집에 사는 고모부와 저녁을 먹다가 춥고 어두운 새벽에 교회에 혼자 걸어가는 것이 짠해 보이셨던지 고모부도 함께 새벽기도를 나가신다고 했다. 그날부터 여태껏 새벽에 고모부 차를 타고 새벽기도를 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 동역자를 붙여주신다더니  신기하리만큼 혼자서는 눈도 떠지지 않던 것이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니 새벽기도는 군소리 없이 그냥 가야 되는 일이 되었다.   


1000일의 기록 일기장이 있어서 거기에 기록을 하고 있다. 1000일을 왠지 채워야 할 것 같은 이 일기장은 또 어찌 내 손에 들어왔는가. 100일 기록장도 있던데.

마침 이 일기장이 내 손에 들어온 것도 이유가 있을까

1000일... 3년의 시간을 광야로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노트를 뒤적이며 새벽기도 100일째 되는 날 , 22년 2월 10일 이런 기도가 쓰여있다.

가장 마지막 구절에


그 사람의 영혼의 취약점대로 환난을 주신다.
시험하시고 광야에서 시험하시는도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라.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기를....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 이게 내가 가장 크게 바뀐 관점이다. 

나는 지금 계획하지 않은 너무 다양하게 하고 일을 하고 있어서 내가 하는 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느낌은 알겠다. 제대로 가고는 있는 거 같은데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자꾸 시험에 든다. 


나의 영혼의 취약점이란 무엇일까. 


 '생명을 살린다'는 것이 꼭 의사가 아니어도 어떤 느낌과 감각은 알겠는데 아직은 언어로 표현을 못하겠다. 이것을 나의 글로 쓰기 위해서는 더 광야로 나가 경험해 봐야 하나보다. 

어떤 연유로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는지 말씀은 쓰여있지 않고 앞뒤 맥락은 모르겠으나 

오늘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 하마 성경 정은수 집사님의 공감 이야기와 연결되었다.

4차 산업에 맞는 일을 해라. 어느 분야의 직업에서든 공감자가 되어라, 공감자에서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나의 쓴뿌리를 버리지 마세요. 
꼭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돕게 됩니다.
그 사람을 다시 세우고 일으키는 일. 3E를 가진 치유자가 되세요.
나는 그 경험을 겪고 있거나 이미 겪어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쓰임 받는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한이 서려있는 사람, 상처 쓴뿌리가 많은 마음밭에서는 성령님이 일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러하기에 깨끗한 마음밭을 만들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라며.


3E란.

Entering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서

Empowering 힘을 실어주고 

Envisioning 비전을 주는 것


타인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내가 먼저 내 삶에서 치유받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말과 같다.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아픔, 슬픔, 충격적인 사건들 분명 있다. 권민 대표님이 회고록을 쓰며 계속 강조하는 말이 이 의미였다. 나에게 필요한 연결되어야 할  이야기는 계속 실타래처럼 이어져서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20년 다니던 회사를 퇴사 후 4년 차이다. 무계획으로 회사를 나온 후 4년 차의 여정의 느낌은 현재 이렇다.

케 세라 세라. Que Sera, Sera.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겠지.


그동안 나의 삶에 일어난 일이란.

내가 계획했던 일들이 아니어서 언빌리버블 한 나의 경험들.


퇴사는 내 삶에 자유이용권을 끊은 듯 즐길 줄만 알았던 처음 20년 만에 찾아온 자유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 내 자유로 주어지진 않게 하셨다. 퇴사를 하고 이미 나와 어머니의 짝을 맺어주신 듯 어머니의 병간호가 시작되었고 정말 그때 내 눈물이 다 나온 것 같다. 어머니와 이어진 아버님의 간호와 죽음은 돌이켜보면 감사하게도 나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너무나 다른 죽음을 대하는 두 분을 보며 어떤 의미에서 치유였던가. 


치유란 뜻이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함이라는 데 나의 무엇이 치료되었길래 어떤 병이 나아서 슬픔 속에서 치유란 말이 쓱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슨 쓴뿌리의 병이 있었기에 ,


내가 나의 무덤까지 갔다 온 기분이 든다. 흑백영화의 필름처럼 자세히 뭔가는 보이지 않는데 현세에서의 끝을 본 느낌. 나는 평생  삶에 대한 불만족의 병이 있어서 즐거운 일이나, 기쁜 일이나 , 슬픈 일이나 애통할 만한 일에도 고만고만한 감정을 유지했다. 기쁠 때 실컷 웃지 못하고 슬플 때 애통해하며 울지 못하는 나를 봤다. 좋게 말해서는 감정의 기복이 얕고 평정심을 유지한다.  

내가 입을 수의, 불타는 육체, 가루가 된 나. 엄마를 강에 뿌려 미안했는데 새삼스럽게 나도 엄마처럼 강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성령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한 조각을 본 것 같다. 전지전능한 분이 있다는 걸 믿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도 내 주변 아주 가까운 곳에 내내 계셨다는 것을.

병실 내내 감쌌던 노랗고 자줏빛 기운의 자애로운 기운. 어머니의 눈에만 보이는 검정 것과 하얀 것과의 실체랑 대화를 했다. 결국 검정 것은 어머니의 숨을 거두어갔지만 마지막 어머니의 눈을 감는 모습은 자비롭다고 느꼈다. 안타깝다고 말하는 아버님의 죽음은 어머니를 따라가기 위한 있을 수 없는 부작용과 아이러니한 상황들로 위장되었으나 계획된 일이라는 느낌. 


육체는 없어졌는데 내게 남은 건 정신적인 안도감이다.  

죽음의 파노라마를 보며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 한마디가 남았다 


"네 마음을 지켜라 "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안에서 남이라. 잠언 4장 23절-


배실장 님이 해주신 '네 마음을 지켜라'는 말을 듣고 나중에 성경을 통해 또 이 말씀을 들었다.

네 마음을 지켜라 이것이 나의 소명인가. 나를 위한 핵심 콘텐츠인가. 


마인들 링이라는 앱을 최근에 사용해봤다. 정말 마음관리에 정말 탁월한 앱이었다. 마음관리 또한 컴퓨터 AI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인가. 돈을 내고 직접 해보니 건강한 사람이 잠시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셀프로 마음관리가 될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지키라'는데 나보다 더 훌륭한 전문가의 이론과 인공지능 무기로 치료방법과 근거를 내세우며 셀프 관리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네 마음을 지켜라. 4차 혁명 시대에 이 메시지로 나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


내가 나다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있는데.... 
그런데 돈은 안될 것 같은 일이에요 


나를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 말이다. 

나다워지고 있는 느낌. 이 시작은 좋은데 뒤에 붙는 꼬리말.......'돈이 안될 것 같아요.'


나다워지고 있다는 느낌은 내가 깎여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조각되는 느낌. 돌덩이 속에서 칠 건 쳐내며 다져나가는 기분. 무엇보다 아이들의 변화 덕분에 맞게 내가 성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고 주변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중학생 딸 덕분에 청소년 꿈결 아트 꿈지기 선생님을 해봤으며 그 덕분에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던 학부모인 숲학교 원장님의 제안으로 7세 반 미술 선생님을 하고 있고  그 덕분에 광주시 강사은행에 강사로 등록을 했다. 강사로 등록하니 교회단체 이름으로 광주시 재단의 보조금사업을 하게 되었다. 대안학교를 진학하는 둘째 딸 덕분에 나는 미래 아이들의 교육에 발을 깊게 담그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미술 선생님을 하다 보니 초등학교에서 미술치료 프로그램 의뢰가 들어왔고 경력이 없어 안될 법도 했는데 혼자 지원한 턱에 초등학교 2학년 전학년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반에서 제일 문제아로 여겨졌던 한 아이는 마지막 인사말을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외치며 아이들은 나에게 작은 손을 오므려 하트를 날렸다. 최근 느꼈던 감정 중 가장 큰 감동의 도가니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신 말 "서로 사랑해라. 그게 전부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슨 사랑을 준거지? 


열심히 20년을 회사 다니면서 결국 공허하고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디자이너 명함은 나의 성취 도구일 뿐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일,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대안적인 것을 원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창조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내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내 삶은 되어지고 있는 중이다.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는 눈을 가진 '바위 안에 비너스- 바위 안에 본질을 보는 사람 ' 

비너스란  닉네임은  뭔가 이름이 길고 간지러운 닉네임이지만 나를 처음 만난 코치님이 붙여준,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의 첫 이미지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영혼의 취약점. 아마도 사랑일지 모른다. 

내게 사랑이란 단어를 계속 비춰주신다. 

 


많은 진실된 일들이 얘기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인가. 

돈은 안 될 것 같아요..
 

뒤에 붙는 이 말이 왜 자꾸 따라붙는지 나는 알고 있다. 

돈에 대한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 내 마음밭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다. 

퇴사하기 전 주식으로 목돈을 벌어보겠다며 큰돈을 몰빵하고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내 생애 가장 큰 액수라 얼마라고 말도 못 꺼낸다. 정말 쭉쭉 주가가 올라갈수록 앞뒤 따지지 않고 돈을 끌어모아 계속 샀다. 정말 미쳤었나 보다. 나는 그것이 하늘이 준 나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니 어리석다.  이런 일이 나에게도 생기는구나!! 쾌재를 부르며,,,, 퇴직금, 보험, 은행 다 끌어모아 대출받았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소개해준 주식이었기에. 우느님이라고 부르며. 회사생활 20년 한 돈을 한 번에 벌 수 있구나라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 

우느님이 하라는 대로 한 죄밖에 없는데 돈을 다 날리고도 난 그 사람을 탓하지 못했다. 

욕망을 우상으로 섬긴 죄...... 이게 나의 죄다.  하나님은 내 생각을 읽으셨다. 


이런 빚쟁이 상황에서 십일조를 마음으로 심었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 알 것이다. 거기다 수입까지 없었던 나는 신랑의 월급의 10프로를 냈다. 찬양팀을 이끌고 있는 신앙심이 있을 것만 같은 신랑조차 지금은 우리가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때인가 주저했다. 그 주저함에 마음이 흔들릴까 봐 나는 그 뒤로 신랑한테 말을 하지 않고 십일조를 냈다.  전기세, 수도세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듯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신랑도 모르는 이 엄청난 빚만 없더라도 마음 편히 내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실장님한테만 이 진실을 털어놨다. 제일 먼저 하신 얘기는 "너 답지 않았네."

사실 돈만 보고 쫓아가는 건 제일 나답지 않은 행동의 결과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 불안하고, 이미 가진 것은 없어질까 봐 긴장하고, 불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살았던 감정의 폭발이 이렇게 나왔다.  나는 감정을 중재시키고 평정심을 잘 찾는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그냥 마음을 억누르고 산 것이다. 사랑의 결핍이 이렇게 드러나나 보다. 나의 욕망만 따라간 이 죗값을 십일조로 심고 있다. 


배실장 님이 권해주신 일이다. 이것이 잡초 같은 풀을 다 죽여버리고 새로운 싹으로 자라기를 바라며. 일단 이 욕망 덩어리 돈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다. 세상의 기준에 인정받고 싶어서 나의 존재가 휘청거렸던 수치심이 드러난다. 사악한 의도는 없었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나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부끄럽다. 정직을 무기로 삼았던 내가 무엇을 믿었던가. 무너져버리는 경험이다.





진실된 일을 글로 쓰다 보면  내 삶에 '뭔가 있는가 보다~~' 하면서 글이 써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 희한하다. 기대를 품게 한다.  

"너의 삶은 되어질 것이다~" Envisioning~~


내가 따라가야 할 실이 있다는 막연한 느낌표를 갖고 살았다.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느낌표는 하나님. 그분이라는 걸 믿는다.

이 고백조차  은혜여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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