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니요 딱히.."
"아, 저는 계속 저를 보시 길레 뭐가 필요하신 줄 알았어요. 술좀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네.. 변호사님은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아니요 뭐..."
"아.. 그러면 두 분 얘기 계속 나누세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시고요. 하하.."
여주인이 자리를 피하고 잠시 엄마와 나는 침묵을 지켰다. 엄마는 여주인의 뒷모습을 또다시 유심히 바라보고 계셨다. 그런 엄마를 나 또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
"어.."
"네 이모가 생각이 난다.."
"..."
"네 이모도.. 저렇게.. 저렇게 살고 있겠지.. 어디선가.."
"..."
"어째 나이도 나랑 비슷해 보이는 게.. 딱 네 이모를 보는 것만 같아.."
"..."
"생긴 건 영판 다른데.. 자꾸 이모 생각이 나.."
"이모는 어떻게 생겼어? 기억이 나..?"
"이모는.. 예쁘장했어 엄마랑은 다르게.."
"엄마가 뭐 어때서.."
"하하.. 그래도 우리 아들밖에 없네.. 근데 이모는 정말 예뻤어.. 술집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었는데.."
"..."
"에효.. 어디서 어떻게 사는 건지.. 살아는 있는 건지.."
"그런데 엄마..?"
"응?"
"이모 얼굴도 바뀌지 않았을까? 엄마도 몇십 년간 이모 얼굴을 못 봤잖아.."
"그럴 수도 있지.."
"..."
"그래도 옛말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엄마는 이모를 보면 딱 알아볼 수 있어."
"..."
"진짜야.. 아마 이모도 엄마를 한 번에 알아볼걸?"
"..."
"그 표정은 뭐야, 엄마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아니..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가족이라는 게 무시 못하는 거야.. 하하.."
빈 술잔에 그리움과 아쉬움, 서글픔과 슬픔이 덕지덕지 묻은 엄마의 씁쓸한 억지웃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들 술 한잔 더 할까 우리?"
"그러지 뭐.. 하하.."
주고받은 한잔에 엄마의 그리움, 집어 든 오징어에 엄마의 아쉬움, 또 한잔에 엄마의 서글픔, 입에 넣은 땅콩에 엄마 슬픔까지 다 와그작와그작 부셔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한참을 엄마와 실없이 웃으며 한 병을 다 비울 때쯤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근데 엄마"
"어?"
"저 여주인 이름이 뭔지 알아?"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이름이 이 보언 이래.."
"이.. 뭐라고?"
"이 보 언"
"이보언..."
갑자기 또 표정이 어두워진 엄마를 보며 이제 진짜 결론이 났다는 생각에 나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이름 특이하네.. 보언이라.. 보은도 아니고.."
"엄마 이름이랑 비슷하다 그렇지?"
"그것도 그러네.. 이모 이름이랑도 비슷하다.. 하하.."
"이모 이름은 뭔데?"
"이모 이름은.. 보.. 인이.. 보인이.. 보인이.. 보배 보에 사람인.. 보배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할머니가 지어주셨었는데.."
"아.. 보인..."
"보배 있는 사람이 되랬더니.. 참.. 사람 팔자 이름 따라간다는 것도 다 헛소리야..."
"..."
"에이.. 이런 얘기 그만하고 아들..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엄마 좀 누워야겠어, 오래간만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눈앞이 핑핑 돌아 돌아.."
"그래요.."
보배 있는 사람. 보인. 이 보인. 그리고 이 보언. 한 끗 차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흔한 가요의 한 소절처럼 점하나 만 찍으면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인연의 두 사람. 엄마와 이 보언 씨. 미련 없이 흘러버린 세월 탓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든, 정말 알아볼 수 없는 사이였든 결국 마무리는 내가 짓기로 하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
평온한 아침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어떤 굉음도 총성도. 남들에겐 평온한 아침이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집안이 조용했다. 아마 어제 과음으로 엄마도 일어나지 못하신 듯했다. 티브이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집. 엄마가 일어나시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세수만 대충하고 집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일어나셔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꿀물을 타 드실 엄마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문영 씨"
"변호사님 나오셨어요. 얼굴이 안 좋으시네요. 잠 못 주무셨어요?"
"어제 과음을 좀 해서.. 여하튼 이거랑 이보언 씨 유전자랑 일치하는지 국과수에 의뢰 좀 해줘요."
"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의뢰만 좀 해줘요. 부탁해요."
"아.. 네.."
"별다른 일은 없죠?"
"그게.."
말끝을 흐리는 문영 씨 모습에 나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괜찮아요. 말해요."
"...."
"지연이 판결 났어요?"
평소엔 똑 부러져도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문영 씨의 성격을 잘 알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쉽진 않았다. 가볍게 꺼냈지만 지연이 이름을 입밖에 내는 순간 그 얼굴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네.. 그게..."
"나 진짜 괜찮아요. 이미 내 손을 떠난 아이예요."
"...."
"..."
"사형이 확정되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