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언제 읽어요?"
누군가와 이야기하다 책 주제가 나오면 내 눈은 유난히 반짝인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가수, 사회 뉴스 등에 관심이 없다 보니 다른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책 이야기가 나오면 7-80%는 내가 읽었거나, 읽어보고 싶었거나, 하다못해 알고 있지만 별로 흥미가 가지 않던 책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재미있게 읽었었어요!"라던가, "아, 그 작가님 책중에 그건 못 읽어 봤지만 이건 읽어봤어요. 그것도 읽어봐야겠어요"라고 말하면 늘 끝에 따라오는 것이 바로 서두에 던진 질문이다.
"그냥 틈틈이 읽어요."
평소에는 이렇게 가볍게 대답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복적으로 질문을 받다 보니 내가 내 일상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나는 꽤 많은 순간순간들을 책과 함께 하고 있었다. 가령, 아이들을 재울 때 운 좋게 같이 잠들지 않은 시간에, 혹은 너무 이르게 잠에서 깬 어느 새벽 시간에, 아이들이 자신의 놀이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가끔은 엽기적 일지 몰라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나, 아파서 몸을 쓸 수 없는 시간 등등에 책을 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왜 책을 읽지?"
책을 읽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참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그중에는 남에게 나 이만큼 책 읽는 사람이란 걸 뽐내고 싶은 어린 마음도 있고, 나의 자녀가 책을 가까이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모범을 보이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도 있고, 애정 하는 작가와 선호하는 장르가 있기에 즐기는 마음도 있다.
또한 빠질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성향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다 잠든 밤,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엇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책을 읽고 있다고 했고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동생이 적잖이 당황한 것이 핸드폰을 메신저를 타고 느껴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끼리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나에게 애들 자면 뭐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그 동생이 말했다. "언니는 오징어 먹으면서 책 읽는데" 순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맞아요. 책 읽거나 티브이 보거나 빨래 개거나.."
"여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안 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지만 많이 당황했고, 조금 불쾌했다. 내 대답을 가로채 이해 안 간다는 듯이 말한 그 동생에게 불쾌했고, 책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놀란 듯한 눈빛으로 일제히 나를 보던 지인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나의 감정을 이야기하며, 당신도 책을 좀 읽어라라는 말을 덧붙였더니 남편이 한 말이다. 내가 이상하다고. 하루 일과를 끝내고 겨우 가진 내 시간에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글을 쓰거나 책을 보는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물은 것이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맞다.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하는 성향이다."
남들이 다 인정할만한 엄청난 성과를 내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내 역량이 부족해서 내가 쓰고 읽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행위들은 나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내 시간을 어영부영,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만족감이다. 그렇다고 자유시간에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 영상을 보는 남편을 한심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이해는 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가끔 구박을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삶을 채워가는 방식이고, 나는 나의 방식대로 내 시간을 꾸려가는 것이기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나는 어떤 책을 선호하지?"
이 질문에는 뚜렷하게 답을 할 수가 없다. 처음 책에 재미를 붙인 건 엄마가 추천해주신 "시드니 셀던"의 추리소설 덕분이었다. 꽤 오래된 추리소설이었지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뒤이어 일본 추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를 알게 되었고 일본 추리소설에 한참 잠겨있었다. 한동안 일본 추리 소설만 계속 읽었다. 읽고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어떤 문화적, 문학적 차이에도 이질감보다는 신기한 감정이 더 많이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관계가 악화된 후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애국심이 불타올라 일본 불매에 동참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일본 추리 소설책을 구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문화적인 것까지 굳이 배척할 필요가 있냐 했지만 나로서는 평소 일본 음식이나 술, 의류 브랜드 등등에는 소비가 별로 없던 터라 중단해야 할 것은 책밖에 없었다. 마음이 정말 텅 빈 느낌이었다. 누군가 내 가슴을 두드리면 빈 깡통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무엇으로든 채워야 했다. 함께해온 시간이 있기에 당장 어떤 장르가 들어온다 한들 일본 추리 소설의 자리를 꽉 메우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찾아야 했다. 대체품을.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제목이 눈에 들어오면 읽고, 누가 추천했다고 하면 읽고, 그렇게 읽기 시작하니 드넓은 책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책들이 있었는가. 이렇게 많은 작가가 있었는가.
그래서 지금의 나는 다양한 책들을 경험하는 중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주 가끔은 일본 추리 소설책을 읽는다.
"나에게 책은 어떤 의미이지?"
나에게 책은 스승이고, 도피처이고 쉼터이다. "스승"이라 칭한 것은 지식적인 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읽고 나서 몇 해, 혹은 심할 경우 몇 달이 지나면 줄거리를 기억 못 하는 책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스승"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작가들의 감성, 표현력, 문장력, 그리고 인내가 책 한 권에 다 들어있고, 그것들을 내가 100%는 못 느낀다 하여도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남는 여운에 숙연해 질만큼은 느끼며 그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을 다룬 소설책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완성된 책을 읽은 나도 이렇게 화가 나고 슬픔이 차오르는데 모든 역사적 흔적을 찾아 마주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얼마나 심적으로 힘든 시간들을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에 존경심까지 든다.
또한 일상이 너무 버거워서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가장 쉽게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책이다. 한 장, 두 장을 읽다 보면 어느새 책 속에 빠져들고 잠시 동안이지만 내가 처한 현실에서 거리를 둘 수 있어 정신적인 도피처이자 쉼터가 되어준다.
"책을 읽고 나서 기록하는 이유?"
가장 큰 이유는 책의 뒷 표지까지 완전히 다 읽었을 때 그 느낌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애잔하면 애잔한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감탄하면 감탄하는 대로 다 기억하고 싶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억력이 좋지 않기에 열심히 기록을 한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글로나마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책을 읽었는데 이것이 좋았고, 이것이 안 좋았어요. 이런 느낌을 받았고 이런 부분이 좋았고 나빴어요. 저는 이런 작가를 좋아하고, 이런 책을 좋아해요.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싶은데 말로는 스스로가 한계점을 크게 느끼기 때문에 주로 글로 쓴다. 이렇게 글로 한번 남겨놓으면 생각이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고 그 정리된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조금 더 효과적으로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 꾸준히 기록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
한 번쯤 "책 읽는 엄마" 매거진을 만든 이유를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사실 매거진을 만들면서 첫 글로 썼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 매거진에 있는 글 중에 몇 개를 엮어서 브런치 북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이 시기에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써 내려가게 되었다.
나의 브런치를, 혹은 이 매거진을 꾸준히 구독해주신 분들은 이미 알겠지만 나는 엄청 긍정적이고 마음이 넓은 독자는 아니다. 그래서 리뷰를 쓸 때도 철저히 내 주관적으로 내가 느낀 느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의 의미는..?"
나는 주로 소파에 책을 두고 읽는다. 어떤 책이든 예외는 없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소파에 두면 우리 집에 아이가 둘이 있기 때문에 자주 떨어지고, 꽂아놓은 책갈피는 수시로 없어지고, 가끔 아이들이 깔고 앉기도 하고 뭘 흘리기도 하고 최악의 상황은 찢어질 수도 있고 젖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워낙 평소에도 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더니 우리 아이들은 책에 낙서도 안 하고 접지도 찢지도 않는다. 그러나 집 도처에 책이 널려있는 것이 가장 큰 부작용이다. 우리 아이들도 자기 전 정리할 때 외에는 책을 바닥에 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파에 책을 두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가장 소중한 건 도처에 둬라"라는 문장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아끼는 책이라고, 읽는 중인 책이라고 마음을 담아 어디 한 곳에 놓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아 내가 읽으려고 마음먹은 순간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도 있다.(특히 첫 장부터 동기부여가 안 되는 책들은 눈에라도 안 띄면 영영 읽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파에 놓는다. 물론 다 읽으면 곱게 책장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소파에 책 한 권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