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순위가 바뀌다.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추천해줄 것이 있냐고 누군가 물으면 늘 손에 꼽던 작품들이 있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악의"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내용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악의는 주인공이 "작가"였다는 사실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후반부를 읽으면서 감탄에 감탄을 마지않았던 감정만 또렷이 남아있다. 그런데 최소 10년간 지켜온 이 애정 순위가 바뀌었다.
문득 쓰고 나니 "애정"이라는 표현이 걸맞은지 생각하게 된다. 비단 "애정 한다"라고 하면 한번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계속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나는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안 읽으니 표현을 바꿔 "감명받은"책이라고 해야겠다.
나에게 긴 여운과 엄청난 감명을 주어 추천순위를 바뀌게 한 작품은 바로 "인어가 잠든 집"과 오늘 리뷰할 "녹나무의 파수꾼"이다. "인어가 잠든 집"은 읽은 지가 몇 년 되었지만 후에 기회가 된다면 기록을 해보겠다.
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 도서관에 들일 책을 사는데, 이때 감사하게도 교직원들이 희망하는 책도 구입할 수가 있다. 나는 차마 신청하지 못했던 히가시노의 책을 신청한 어떤 교직원이 있었고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 덕분에 이 책을 접할 수가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접한 히가시노의 책이기에 기대를 잔뜩 하고 펼쳐 들었지만, 내용 자체가 어두웠고, 나의 기분도 그 당시 어두웠다. 그래서 작정하면 한 시간에도 읽을 수 있었지만 정말 지지부진하게 진도가 안 나가던 책이었다.
그래서 거의 몇 주는 걸린 것 같다. 완독을 하기까지. 이 책을 한 손에 걸어놓고 다른 책을 두 권 정도 읽어냈으니. 하지만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날,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 마음먹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날 완독 했고 마음에 진한 여운이 남았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내놓고 나의 혈연인 누군가에게 염원을 남길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나에게 남은 질문이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한 이유는 이 책의 제목에 나오는 "녹나무"가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녹나무에 와서 "염원"을 남기는 "기념"을 한다. 그런데 기념을 할 때에는 원칙이 있다. 바로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언"의 방법으로 "기념"을 선택한다. 내가 지정한 사람, 혹은 지정을 하지 않는다면 혈연에 한해서만 그 "염원"을 "수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염원"을 "수념"하는 사람은 녹나무에 남긴 사람의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의 기쁨과 행복뿐만 아니라 좌절과 절망, 그리고 비열함과 치졸함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바랐던 희망과 수념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었던 그 무언가까지. 참 신비롭지 않은가.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정말 이런 녹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매개체가 어딘가에 있다면 두려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 것만 같다. 누구에게나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싶은 욕망은 있을 테니까. 그것에 따른 사회적 비난, 관계 절연 등이 무서워서 하지 못할 뿐.
기록이 남지도 않고,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의 모든 것이 내가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전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녹나무의 영험함을 믿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는 조건 자체가 나에게는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나는 과연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념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유언"의 방법으로 "기념"은 참 솔깃하긴 하다. 어차피 나는 죽은 후니까 그 후에 나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밝혀진다 한들 어쩌겠는가 라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수념"의 조건은 "혈연관계"이다. 즉 나의 부모, 나의 자녀, 나의 친척, 즉 나의 가족이 수념을 하는 동시에 나의 어두운 면도 다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가혹하다. 물론 나의 가족이 수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녹나무의 영험함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염원은 녹나무 안에 평생 봉인되니 이것이 또 다른 녹나무의 함정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녹나무가 가지고 있는 염원의 영험함 때문에만 내가 이 책을 추천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 녹나무를 두고 벌어지는 등장인물들의 제각각의 사연이 때로는 가슴이 아프고, 때로는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책이 너무 두꺼워지거나, 내용을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서 여운을 남기고 끝맺음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이야기가 이어졌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은 다 읽고 학교에 반납했다. 사실 조금 아쉬웠다. 오랜만에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 일단 등장인물이 많기에 일본 소설책을 많이 접하지 않은 분들은 이름 하나하나가 너무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대부분의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책은 등장인물이 많다.) 게다가 두꺼운 장편소설이며, 일본 특유의 문화와 일본 소설에서 내가 유난히 많이 느낀 스산함과 미신적인 요소가 가득가득 들어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에게 추천하기에는 약간 꺼려지는 책.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팬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책. 녹나무의 파수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