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기억나는 그 눈빛
기억이 희미하다. 벌써 20년도 더 된 어느 날의 일이다. 열여섯의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으로의 진급을 얼마 남기지 않은 그때,
담임선생님의 말은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이 성적이라면 인문계에 진학을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아니 나를 따돌리는 아이들과 함께 상업계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이 지긋지긋한 창피하고 서글프고 외로운 생활은
중학교에서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앞으로 더 많은 나날들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었다.
당장 공부에 돌입했다. 마치 고등학교 3학년이 된 것처럼 학교가 끝나면 바로 동네
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독서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밤 10시 11시가 되도록 공부를 했다.
같이 놀 친구도 없었으면서 공부는 왜 안 했었을까.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정말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공부는 이미 안중에 없었고 학교가 끝나면 하루하루 그냥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어딘가에, 더 이상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희망을 붙잡고 있었나 보다.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기초가 없었기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혹은 스스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은
무작정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온 글자 하나 남기지 않고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시절을
학교와 독서실에서 다 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다이어트도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건 방학 때였다. 15년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날씬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마음을 아주 독하게 먹었다. 70kg에 육박하던 몸무게는
서서히 빠지고 빠졌다. 콩알만 한 줄 알았던 눈은 대추만큼 커지고, 없는 줄 알았던 목은 항목처럼 길어졌다.
32인치에 달하던 허리는 이십몇 인치로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났다. 16살에.
나의 달라진 모습은 학교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나를 마치 학교 운동장에 피어오른 잡초처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때로는 밟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 관심들이 새롭게 느껴지다가 나중에는 역겨웠다.
그리고 갑자기 전교 11등까지 오른 성적에 선생님들의 입방아에 내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성적이 아주 많이 올랐다며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인문계에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마음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이제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면 고등학교에서는 새로운 나로 새롭게 시작해보는 거야!"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세상은 좁고, 내가 살던 동네는 더 좁다는 걸. 결국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구성원이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간이라더니, 그게 딱 나였다.)
이름도 특이하고, 갑자기 성적은 상위권으로 튀어 오르고, 살을 15kg 정도 뺀 신기한 아이라는 타이틀이
서서히 빛을 바라지자, 갑자기 예상치 못한 괴롭힘이 날아들었다. 남자애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다. 나만큼이나 이름이 흔하지만 특별한 아이.
키도 크고 피부가 유난히 하얗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했으니 꽤 오래 좋아했었고,
졸업하고도 졸업앨범 사진에서 그 아이의 증명사진을 오려 간직할 정도였으니 많이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나는 벌레와도 같은 존재였다.
초등학교 시절, 짝꿍을 바꾸는 날이었다.
하늘이 날 도왔는지 그 남자애와 짝꿍이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자아이는 교실에 없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먼저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이었다. 자신의 짝꿍이 나라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화가 난 모양이었다.
쿵쿵거리며 들어와서는 창가에 걸터앉아 내가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상에
떡하니 발을 올려놓고 또 쿵쿵거렸다.
치욕스러웠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미치도록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하늘은 이상하게 그때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 남자아이와 같은 중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중학교에서 그 아이는 요즘 말로 소위 "인싸"가 되었다.
"일진"이 되어 아주 학교를 휘두르고 다녔다. 나는 여전히 친구가 없고 뚱뚱하고 못생긴 아이였다.
그런데 내가 성적을 올리고 살을 빼고 나니 그 남자아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우리 엄마 표현에 따르면 미련 곰퉁이인 내가 느낄 정도로 달라졌으니 아마 주변에서는 더 빨리 알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썸이라던가 좋은 기류가 흘렀던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친구가 없는 아이였고
그 아이는 여전히 "인싸"에 "일진"이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건 내가 더 이상 그 남자아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다. 그냥 나는 그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떤 날 하루, 그 남자 아이반의 체육시간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인기가 많은 그 아이가 축구하는 모습을 보고자 여자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다 창문으로 붙었다.
나는 아이들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서 창문 쪽을 보고 있었다. 딱히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다들 보고 있으니 그냥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가 보였다. 하얀 피부, 벌게진 얼굴, 큰 키, 마음은 식었지만 다시 봐도 멋있었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조차 멋있게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저 "인싸"후광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다.
여자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아이가 교실로 향하는 모습을 매미처럼 달라붙어 보고 있었다.
그때, 그 남자아이가 우리 반쪽을 보고 팔을 뻗어 자신의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었다.
큰 파도를 맞은 듯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나도 보았다. 무표정으로.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 친구한테 잘 보이려고 별 짓을 다하네.
당시 그 남자아이의 여자 친구는 같은 "일진"라인의 예쁘장한 아이였다.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더럽지만 이름이 예쁘고 얼굴이 예뻤던 아이.
둘이 커플이라는 건 전교생이 다 알았다. 나도 알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아이의 여자 친구가 우리 반 문을 정말 쾅! 열고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그 남자아이의 여자 친구는 우리 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