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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Dec 10. 2022

유명인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야기

Feat. 라디오 방송

겨울에는 유난히 화장실에 가기 싫다.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내 몸을 감싸는 찬 공기가 너무도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1초라도 빨리 갔다 오려고 화장실로 전력질주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이 진동하거나 말거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이기에, 후다닥 볼일을 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에 몸을 맡긴 채 의자에 거의 녹아내리다시피 앉아서 핸드폰을 열었다. 진동의 정체는 문자메시지였다.


"당첨자"로 시작한 문자는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많이 담고 있었다. 두 번, 세 번 읽은 후에야 문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심장이 갑자기 엄청 두근대기 시작했다. 문자의 내용은 이러했다. 내가 대략 2-3주 전 어느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올린 사연이 당첨되어 방송되었고, 선물을 보내줄 테니 링크를 따라 들어가 주소를 입력하라는 것.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방송이 되었다면, 방송이 되기 전에 나한테 알려줬어야지(음.. 그러고 보니 그동안 02로 시작되는 번호로 전화가 여러 번 왔었는데 방송국 번호였나? 전화를 안 받으면 문자라도 보냈어야지....) 방송된 지 2주가 지나서야 연락을 준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사 방송사 중에 한 방송사에서? 음.. 안 되겠다. 진짜 방송이 되었는지 라디오 프로그램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자.


긴장되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해 로그인하고, 해당 날짜 방송 다시 듣기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진짜로. 내가 올린 사연이 유명인(진행자)의 목소리로 읽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 마. 이. 갓. 진짜였어. 이 문자가 진짜였다고! 아.. 이 방송을 놓치다니. 이 방송을! (사실 사연 올려놓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잊어버린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이 가슴 가득 차올랐지만 이렇게라도 들었으니 이게 어디인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의심스럽게만 보였던 주소가 갑자기 광이 나는듯했다. 눌러보니 당첨내역이 뜨면서 주소를 입력하라는 창이 세 개나 떴다. 오메나. 선물을 세 개나 보내준다는 거야!? 오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주소 입력을 다하고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지인 덕분에 방송을 녹음할 수 있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듣다 보니 진행자가 읽으면서 유독 한숨을 많이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보낸 사연은 최근에 어떤 매개체로 인해 떠오른 나의 지옥 같았던 학창시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진행자들은 사연을 다 읽고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매개체였던 물건에 대한 자신들의 얘기를 할 뿐.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도 없고, 꺼내서도 안되기에. 게다가 이들은 공인이 아니던가. 공인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서 나의 아픔에 대해 위로하는 것 말고 그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 역할을 했던 진행자의 끊임없이 쏟아지던 한숨이 그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사연의 주인공인 나는 그렇게 느꼈다.


사연을 마무리하며 진행자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많은 메시지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훌훌 털어버리시라고."


이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다시 방송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이미 날짜가 한참 지난 후라 1000개나 넘는 메시지들을 넘기고 나서야 내 사연에 대한 청취자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메시지가 있었다.


"같이 사연을 듣던 우리 딸이 울고 있어요. 우리 딸도 왕따 경험이 있어 사연을 듣고 울컥했나 봐요."


그 소녀에게 내 사연은 공감으로 다가갔을까, 위로로 다가갔을까, 혹은 절망으로 다가간 건 아닐까. 2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지나도 그때 그 아픈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 내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럴 수 있겠다는 암담한 미래를 본 건 아닐까. 제발 그러지 않기를.


여전히 어떤 매개체가 나타나면 속절없이 그 시절로 끌려들어 가는 나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증오하고, 경멸하기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조금은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마음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녀도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도 조금씩 벗어날 수는 있다는 희망을 꼭 놓지 않기를 바란다.



살다가 또다시 그 매개체를 만날 일이 있을까. 아마 단종되지 않는 한 있겠지. 내가 직접 보거나, 혹은 우리 아이들을 통해.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우리 아이들을 손을 잡고 지금의 내 자리에서 굳건히 버틸 수 있기를 바라본다. 더 이상은 속절없이 끌려들어 가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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