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난다
찬장에서 전동 그라인더를 꺼내 원두를 덜어내고 버튼을 누른다. 향긋한 커피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끄러운 소리. 이 소리를 잠재우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더니 소음은 두배가 되어 이제는 심장까지 쿵쾅거린다. 아..이런 모든과정이 필요없도록 원두가루를 주문한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밀려올때쯤 물도 다 끓고 원두도 가루로 그 모양을 달리했다.
솔을 꺼내 그라인더를 털고 주전자를 꺼내 물을 따르니 그제야 조금 진정되는 가슴. 이미 솔솔 풍겨오는 커피향에 취해 한 바퀴 두 바퀴 물을 따라본다. 누군가는 그랬다. 오직 원두의 한가운데 물을 조금만 부어 원액이 아주 천천히 똑똑똑 떨어지게 해야 풍미가 충만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에 찬 눈동자에 홀려 몇번 똑똑 흘려보냈더니 그 맛이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격이 급하고 시간이 없었던 난, 원래대로 여과지모양대로 물을 흘려보냈고 원액은 아주 급하게 주르륵 주르륵 내려졌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훌륭한 풍미와는 다르게 내가 늘 먹어왔던 익숙한 그맛, 남다르진 않지만 반가운 그 맛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 진하게 품고 있던 어느 기억속으로 스며들었다. 불과 몇년 전, 지금과는 다른 호칭으로 불렸던 그 때 그녀와 나는 늘 점심을 먹고나면 커피를 내리곤 했다.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다보면 너나할것없이 웃음꽃을 피우며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끝맛이 텁텁한 커피가 아닌 깔끔한 맛을 느끼고 싶어서 였는지 우울한 일상속에 숨을 돌리고 싶어서였는지는 더이상 알 수 없지만 누가 먼저라도 할것없이 그저 그렇게 커피를 내리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내릴 때면 늘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결코 지금만큼이나 녹록하지 않았던 그 곳, 그 자리에서 싸우기도 엄청 싸우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 만큼 많이 웃기도 하고 술한잔도 많이 기울였던 만큼 추억으로 잘 품고 있다가 커피를 내리면 누군가 열쇠로 열어버리기라도 하듯이 그 날들을 함께 쏟아내는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 자리가 버거워서일까, 그 날들이 떠난후 켜켜히 쌓인 시간속에서 미화되서일까.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선을 긋듯이 확실히 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때때로 커피를 내릴 때면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한다. 좋았던 사람들,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 쌓였던 오해들과 풀지 못했던 다툼까지 다 끌어안고서 그 자리로 돌아가 하면 할 수록 어려워지는 일을 헤쳐나가며 하나하나씩 다 정리하고 싶은 소망이 커피향을 타고 마음을 깊이 누르는 것이다.
그러다 번뜩, 똑똑 내리면 맛있다는 그녀 생각이 날 때면 후회가 가져다준 미련을 딛고 연락을 해본다.
"커피를 내릴때면 당신이 생각이 나요."라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마음이 편해질까. 6개월이라는 짧은시간동안 쉴새없이 빼앗겼던 나의 잣대들은 언제쯤 되돌아올까.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는것으로 만족하는 날들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아무리 신나고 귀를 세게 울려대는 음악을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우울감은한평생 내가 지고 가야할 짐인걸까.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 곳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무너져버린 나의 모래성들이 정처없이 해맨지 벌써 절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남은 절반의 시간동안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있다면, 그렇게 내가 나로 돌아올 수 있다면 정말 간절하게 그 6개월이 없었던것처럼 살아가고 싶다. 온전하진 않지만 온전한척 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