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버지의 일곱 번째 기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딱 한 달이 되던 날 둘째가 태어나서, 이게 몇 번째 기일인지 헷갈릴 때는 둘째가 올해 몇 살인지를 떠올리면 금세 답이 나온다. 두 돌도 안된 첫째의 손을 잡고 뱃속에 둘째를 품고 대학병원의 중환자실과 집을 점프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아버지가 이제 정말 가시려 한다는 연락을 듣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는데 이미 운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와 친척들은 아버지를 보내서 슬픈 와중에도 나와 내 뱃속 아이가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했었고, 다행히도 둘째는 장례식과 발인과 사망신고와 상속절차 등 크고 작은 일을 치러내는 동안 뱃속에서 무사히 잘 지내다가 태어났다. 부모님이 사시는 지역 병원에서 신부전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폐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집중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며 중환자실로 전실하고, 폐렴이 악화되어 더 이상은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까지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퇴직한 후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경제활동을 놓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내년부터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엄마와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며 살겠다고 선언을 했었는데 그러고 몇 달 되지 않아 중환자실에서 커다란 기계와 여러 개의 줄을 주렁주렁 단 채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이제 좀 쉬면서 즐기면서 살아보겠다고 했는데 왜 하필 지금,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억울함과 분함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하소연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이렇게 일찍 데려가실 거면 그냥 곱게 데려가시지 왜 온갖 고생을 다 시키다가 데려가셨냐고, 아니면 단 1년이라도 엄마랑 여행도 다니고 추억도 쌓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셨으면 안 되는 거였냐고, 기도인지 원망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것들을 퍼붓고 또 퍼붓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정도를 그렇게 슬픔과 원망 속에서 살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근데 나, 원래 아버지를 이만큼 사랑했었나?
내 아버지를 향한 감정은 어떻다고 규정지을 수가 없는 복잡한 것이었다. 분명 사랑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아버지가 혼자서 지방에 사실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진심으로 슬펐고 걱정되었고 내가 자식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도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버지가 불편했고, 미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다 아버지와 단 둘이 집에 있기라도 하면 긴장감에 숨이 막혀서, 방에 틀어박혀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야근을 마친 아버지가 밤늦게 귀가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잽싸게 내 방의 불을 끄고 숨죽여 자는 척을 했다. 집에서 독립하고 나서는 무엇보다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게 너무 신났고, 발신번호표시서비스라는 게 생기고부터 아버지의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언젠가부터 부모님의 생신과 명절이 아니면, 본가에 내려가지 않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만의 생활이 생겨서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마주할 생각을 하면 숨이 막혔다. 그래도 부모니까, 의무감에 하는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약간의 용돈을 숙제하듯이 보내면서 이만하면 내 할 도리는 다 하는 거라고 자위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아버지와 전화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폭식을 하거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하면서 해결되지 못하는 감정들을 털어내려고 몸부림쳤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서 제 몫을 하는 어른으로 성장한 거다,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그게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사는 게 나는 단 한순간도 행복한 적 없었어요. 지금도 별로 행복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네, 네만 하다가 끊은 나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싫었다.
아버지에게 자식교육이란 통제와 훈육이었다. 그 훈육에는 체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체벌의 범위는 아주 넓어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사용해서 어디를 때려도 그것은 다 훈육을 위한 체벌이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는 아주 사소한 것도 다 아버지의 명령과 규칙대로 따르길 원했고 내가 따르지 않으면 아주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서 나를 때렸다. 아버지가 화난 순간에 주변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쟁반이 옆에 있으면 쟁반으로 맞았고, 신문을 보던 중이면 신문지를 말아서 때렸다. 아무것도 없으면 손으로 때렸고, 정말 너무 화가 많이 나면 발로 차기도 했다. 맞는 부위는 주로 뺨이나 머리였기에, '체벌'의 결과는 겉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었지만 실상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저주였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거름으로 쓰지 않고 버렸다고, 식사 시간에 아버지한테 농담을 했다고, 보충수업 대금을 달라고 했다고, 내가 이것저것을 적어 놓은 노트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성적표를 제 때 보여주지 않았다고-정말 다양한 이유로 아버지는 나에게 화가 났고,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는 아버지에게 아무 소리 못하고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고 반항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당시에는 몇 대 더 맞았겠지만, 자꾸 반항하면 아버지도 조금 수그러들지 않았을까, 왜 나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라고 하며 결국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아버지 말대로 나는 시원찮고 못난 아이라서, 결국에는 또 계속 혼났을 거야.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저주의 화살은 어느새 나에게 돌아와 있었다. 너무 못나고 보잘것없는 나 자신에 대한 미움과 불안 때문에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펴야 잠이 오는 밤이 계속되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어도 꼬박꼬박 새로운 하루는 시작되었다. 이십 대 중후반이 되어 기독교 신앙과 심리상담을 통해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일을 멈추고 술담배도 끊고, 소소하고 작은 일에서 행복과 감사를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가보고 싶은 나라도 많았지만, 그래도 당장 내일 하늘에서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모든 걸 다 던지고 기쁘게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