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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Apr 17. 2019

1. 아무거나 눌러 보세요

인도, 내가 그곳에 있었을 때



아무거나 눌러 보세요


인도 게스트하우스 벽면엔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이는 스위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국 스위치의 심플한 구조와는 달리 이곳에는 방 안의 불도, 천장에 달린 선풍기도, 화장실 불까지도 모두 벽면 한 켠에 몰려 있는 거다. 이렇게만 들으면 굉장히 간단하고 편리한 구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도대체 뭐가 화장실 불인 거야!!!”

그 똑같이 생긴 열 개의 스위치 모두 아무런 표식이 없다는 거다.



아니, 뭐가 뭐라고 좀 적어라도 놓든가, 하다못해 색깔이라도 좀 달라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다 똑같이 만들어 놓으면 불 한 번 켤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눌러 볼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오늘 직원에게 내가 이 숙소에 하루 이틀 머물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느냐고 좀 투덜거렸다. 


“여기 자주 쓰는 스위치 몇 개에만 스티커 좀 붙여 놓으면 안 되니? 아니면 매직으로 뭐라도 좀 써 놓던가. 진짜 불편해 죽겠어”라며. 

그랬더니 소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

“왜? 재미있지 않아?”


재미? 재미이?

이 인간아. 화장실 급해 죽겠는데 스위치 못 찾아서 발 동동 구르면 얼마나 화나는 줄 알아?

어우, 이걸 확 그냥! 





나는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날 때부터 호기심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부모님이 ‘현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려면 돈 정말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실 정도였다고. 그런 기질은 십 대에도, 이십 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아 중창반, 합창반에 빠짐없이 가입했었고, 어느 날은 밴드부에 꽂혀 수능을 치자마자 밴드부에 들어 드럼을 배웠다. 남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긴 했지만, 꼭 한 번은 리더 역할을 해 보고 싶었던지라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생회에 들어갔고, 어느 날은 운동을 좀 해야겠단 생각에 수영 새벽반에 가입해 한동안 물질에 빠져 살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도전하면 할수록 성취감보다는 ‘아,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 뒤엔 항상 허무함이 남았다. ‘아, 난 참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몇 없구나.’, 혹은 ‘서현지, 너 정말 끈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인간이구나.’와 같은.

드럼은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었지만,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점점 힘들어졌다. 혼도 많이 났고 욕도 엄청나게 들었다. 그러다 내가 왜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이걸 배워야 하나 싶은 맘에 1년도 안 돼서 때려치워 버렸다. 수영도 처음에는 살도 빠지고 물속에서 폼이 나기 시작하니까 신이 났었는데, 그것마저도 고급반으로 올라가니까 허리도 아프고 더 이상 배우는 재미도 못 느껴서 평영까지 배우다가 또 중도 포기를 했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해 보고 싶은 건 너무너무 많은데 선택지가 하도 많아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또 시작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해내는 게 거의 없는 수준이다. 결국은, ‘꿈만 원대하게 꾸는 의지 박약자 서현지’. 뭐 이런 거지.




“흥! 재미있긴 뭐가 재미있어!! 밤에 선풍기 켜려다가 방 불 꺼 본 적 있어? 취침등 켜려다가 환풍기 켜본 적 있느냐고!”

“워워, 진정해. 미리 알고 누르면 그게 뭔 재미야. 이건 그냥, 놀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놀이. 간단하지? It’s simple.”


하지만 살면서 이것저것을 도전해 보며 약간의 얻은 것도 있긴 하다. 적어도 바다에 빠졌을 때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지만은 않았었고, 어디 가서 음치란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으며, 그렇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시도해 본 덕분에 지금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약간의 자부심까지 가진 채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으니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거.


그저 ‘저거 해 보고 싶다’라고 생각만 할 때보다는 좀 더 괜찮은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래. 조금만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그냥 이것저것 원하는 걸 찾을 때까지 하나씩 다 눌러 보자.

그럼 언젠가 내가 원하는 대로 방 불도 바로바로 켜고, 화장실 스위치도 망설임 없이 찾고, 환풍기도 한 번에 쌩쌩하게 돌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겠지.

수영 배웠다고 다 박태환이 되어야 하고, 드럼 배웠다고 다 유명 아티스트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하다가 ‘아씨, 내가 찾던 건 이게 아닌데’ 싶으면 그냥 또 과감하게 덮어놓고 다른 걸 도전하면 되지.


그러니까, 그냥 나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걸 하나하나씩 다 눌러 보며, 때론 시행착오도 해 가면서, 그렇게 살겠다. 선택지가 많아 고통스러워도 일단은 제일 땡기는 것부터 하나씩 내 몸에 맞춰 보며 그렇게 살련다. 혹시 알아? 그렇게 이것저것 해 보다가 뜻밖에 내가 낚시나 바느질 같은 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단 걸 알게 될지.


자자, 겁먹지 마. 이건 그냥 재미있는 놀이야.

그러니까 이제 걱정하지 말고, 짜증 내지도 말고 당신의 스위치 앞에 서서

평소 눌러 보고 싶었던 걸 ‘꾹’ 눌러 보는 거야.


‘It’s so si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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