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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Jan 03. 2021

신천 초등학교

공부 잘하는 아이만 예쁨 받는 이상한 동네



신천 초등학교



대구로 돌아간 후, 나는 전학생 신분으로 신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에 처음 갔던 날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비가 왔다. 정말이지 너무 많은 비가 와서 온 시야가 회색이었다. 엄마는 교무실까지만 함께한 뒤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어떤 반으로 이동했다. 전학생에 대한 소개는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시험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앉아서 이거 한 번 풀어볼래"


아이들이 고개를 처박고 풀고 있던 시험지를 나도 받았다. 아포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회색 종이. 커다랗고 질감이 까끌까끌한 종이. 시험을 한 번도 쳐본 적 없던 나는 모든 문제를 대충대충 찍고 반 아이들을 구경했다. 반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아포에서는 한 반에 고작 열 명이 안 되었는데 여기는 대충 봐도 한 교실에 사십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 앉은 아이들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문제만 풀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시험지 넘기는 소리. 연필이 종이를 쓰는 소리. 이따금 들리는 한숨 소리. 하품이 나왔다. 대구에 오자마자 아포가 그리워졌다. 이런 따분한 것 말고 얼른 산에 올라가서 아카시아나 사루비아 꿀이나 따먹었으면 좋겠는데. 하긴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안 좋은가. 이놈의 시험은 언제쯤 끝나려나.


며칠 뒤 결과가 나왔고 나는 부진아 판정을 받았다. 아이들은 나를 이름 대신 부진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뜻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 좋은 의미인 것 같아 나는 한 번 그렇게 불릴 때마다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멋대로 나불거리는 것들은 주로 남자아이들이었는데 그것들은 흠씬 두들겨 맞고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은 너무 짓궂었고 틈만 나면 내게 구미에서 온 촌년이라고 놀렸다.


"촌년이라니. 대구나 구미나 거기서 거기지 이 문디들아. 그리고 내 원래 대구 사람이그든?"


정말이지 대구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고 그때마다 나는 쌈닭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발육 상태가 좀 좋았던 것 같은데 웬만한 남자아이들도 내가 주먹을 휘두르면 움찔하며 피했다.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다시 놀렸다. 정말이지 대구 것들은 정말 성가셨다.


부진아로 판정받은 아이들은 집에 일찍 갈 수 없었다. 정규 교육 과정이 끝나면 담임 선생님이 아닌 처음 보는 선생님과 수학 문제를 풀거나 책을 읽는 식으로 많은 시간을 교실에서 보내야 했고 그때마다 시험도 쳤다. 나는 서서히 부진아란 공부를 못 하는 학생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됐다. 신천 초등학교에서의 나머지 수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가 얼마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인지 깨닫게 했다. 공부란 정말 따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알고 나는 모르는 문제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 나는 이걸 모르지.

근데 어떻게 얘네들은 아는 거지.

우리는 똑같은 여덟 살인데.

대구의 살인적인 조기교육 문화를 따라가기에 아포 국민학교는 지나치게 자연친화적이었던 모양이다.


*


신천 초등학교에서의 충격은 하나 더 있었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매일매일 일기 쓰기 숙제를 시켰다. 일기는 아포에서도 늘 쓰던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제출하고 검사까지 받는다는 건 어쩐지 조금 괴랄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글쓰기는 내가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였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간단한 일상 글과 그림을 그려 교탁에 제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학교 앞에서 솜사탕을 사 먹었다. 솜사탕이 구름같이 보송보송했다.

그리고 다음날 선생님은 빨간색 볼펜으로 코멘트를 붙였다.

- 방과 후 불량식품을 사 먹으면 나쁜 학생입니다.


1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드디어 부진아 반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 못하는 애' 딱지는 여전히 따라다녔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나를 놀렸고, 그러면 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속으로 무럭 욕했다.


등신들. 

무궁화 씨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주제에. 

달개비 꽃이 무슨 색인 줄도 모르는 주제에. 

도깨비바늘에 찔리면 얼마나 아픈 줄도 모르는 것들이 말들이 많아.


그래도 전처럼 할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처음 전학 왔을 때만 해도 할 말 다 하고 주먹도 마구 휘둘렀던 것 같은데, 어쩐지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화낼 자격도 없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구는 공부 잘하는 아이만 예쁨 받는 이상한 동네였다.


그렇게 나는 부진아 딱지를 이름처럼 붙이고 2학기를 마쳤다.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구미에서 온 촌년으로, 공부도 못 하는 게 힘만 센 여자애로, 지나치게 드센 미친 시골 애로 기억이 되었겠지.


나는 나를 가르쳤던 모든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이상하게 신천 초등학교 1학년 1반 선생님의 이름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뭐, 딱히 죄송하지는 않다. 이유 없이 놀림당하던 여덟 살 아이를 방임한 대가 치고는 너무 가벼운 벌이니까. 


그 생각은 서른이 넘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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