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조금 일찍 꺼진 남자들
친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어느 날 조금씩 안 좋아지다가 칠십을 넘기면서 완전히 멀었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지만 여러 번의 잘못된 수술도 크게 한몫했다. 할아버지는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났다. 먼저 태어난 큰할아버지는 내 할아버지보다 조금 더 일찍 장님이 되었다. 빛이 조금 일찍 꺼진 남자들은 지금 둘 다 세상에 없다.
나의 아빠는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로부터 신기한 소식을 들었다.
"아부지한테 형이 있다꼬요?"
아빠는 큰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큰 아버지는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갔다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여인 하나와 자식들을 데리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나의 아빠에게는 하루아침에 큰 아버지도 생기고 사촌들도 여럿 생겼다. 나한테 큰 아버지가 있다니. 사촌들이 또 생기다니. 아빠가 이 거대한 변화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할 무렵, 큰 아버지의 눈은 완전히 멀었다. 서 씨 집안에 첫 번째 찾아온 암흑이었다.
두 할아버지 때문인지 아니면 그 윗대의 윗대부터 내려온 유전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가 식구들은 모두 눈이 좋지 않다. 아빠는 백내장 수술을 한 적이 있고, 삼촌은 이미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으며, 그 아래로 셋 있는 고모들도 안경 없는 삶은 살 수 없는 눈을 타고났다. 그래서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나를 낳던 순간에도 온 식구들의 첫 질문은 아들인가 딸인가가 아닌 "눈은 괜찮나요"였다. 나는 눈이 괜찮은 덕분에 서 씨 집안 첫 손주로 고이고이 대접받으며 잘 자랐다. 눈 나쁜 집안에 눈이 나쁘지 않은 아이로 태어났다는 건 상상 이상의 귀한 축복이었다.
앞을 볼 수 있던 시절의 할아버지를 나는 기억한다. 그는 동군장 여관의 주인이었고 늘 로비에 눈사람처럼 앉아 손님을 맞거나 계산하는 일을 했다. 바느질을 하거나 방을 치우는 일은 눈이 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두 할머니가 했다.
동생이 태어나고 내가 동군장 여관에 맡겨지던 시절, 그는 매일 아침 두꺼운 안경을 찾아끼고 사랑방 캔디 통을 열어 백 원짜리 다섯 개를 느릿느릿 세어 내게 내밀었다.
"한나, 두이, 서이, 너이....다서엇.."
하루 500원을 쓸 수 있는 미취학 아동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절 신천동의 부르주아로 살았다. 그가 준 용돈은 뽑기로, 아폴로로, 달고나로, 봉봉을 타는 재미로 마구잡이로 소비되었고 신나게 놀고 돌아온 후에는 여관 로비에 배를 까고 기절한 듯 잠들었다.
어느 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내 옆에 할아버지가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카운터가 아닌 바로 내 옆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주는 용돈은 반갑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란 존재는 내게 무서웠다. 잘못한 것 없이 긴장한 나는 얼음처럼 굳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손을 올려 꽁꽁 언 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어색해 미칠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바닥은 따뜻하고 매끄러웠다. 평생 고생이라고는 안 해 본 것 같은 사람의 손. 그리고 할아버지는 손을 거두더니 천천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잤나?"
묵직한 목소리.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 나는 그렇다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 끝에 있는 막내고모방으로 도망쳤다. 할아버지가 하루에 말할 기회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였다면. 그렇게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런 식으로 도망쳐버리지 않았을 텐데. 그날의 일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미안함으로 내 한편에 남아 있다.
그의 눈은 빠르게 멀었다.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사물의 움직임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던 듯한데,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위치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해졌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동군장여관의 주인이 아니었고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눈사람으로 살았다. 그에게는 일곱의 손주가 더 생겼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고 나이를 먹은 만큼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이름조차 헷갈려 했다.
와중에 절대로 잊지 않는 한 사람이 나였다. 할아버지는 내 이름이 뭔지, 누구의 딸인지, 목소리가 어떤지 정확히 기억했고 때문에 명절날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현지 왔나?"하고 소리 높여 말했다. 묵직한 목소리로. 갈라진 목소리로. 그러면 나는 과장된 걸음으로 얼른 쫓아가서 "네 할아버지! 현지 왔어요!"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여기 있다고. 그러니까 왼쪽 쳐다보지 말고 오른쪽으로 보시라고. 그러면 그는 허둥허둥 허공을 손으로 휘었으며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았다.
"아이고 왔나!"
"네! 저 왔어요"
"잘 지냈재?"
"네 잘 지냈어요. 할아버지도 잘 계셨죠?"
우리 사이에는 안부 인사 외에는 나눌 말이 없었지만 그는 늘 그것으로 만족한 듯 얼른 가서 밥 먹으라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네네! 하며 주방으로 총총 떠났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깊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무엇보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좋을지 방법을 몰라서. 그래서 앞을 볼 수 있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를 쳐다보기만 했던 것 같다.
그가 사망한 건 내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집에서 구토를 하던 그는 화장실을 찾아 허둥허둥 걷다 넘어졌고, 토사물이 목에 걸리면서 손써볼 방도도 없이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너무 허망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고모들은 장례식장에서 가슴을 쳤다. 응급차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앞을 볼 수 있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눈만 괜찮았다면. 그래 눈만 괜찮았다면.
울음바다인 그들 사이에서 나는 가톨릭식 상복을 차려입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꽁꽁 언 사람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솔직히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와 나는 눈물을 흘릴 정도의 유대가 없다. 하지만 어째선지 나만큼은 절대 이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문에 나는 빈소가 차려진 3일 내내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웠고, 아빠의 손에 이끌려 생전 처음 보는 친척들과 아빠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고, 하루 세 번 연도를 했고, 타죽을 것 같은 한 여름날 장지까지 꿋꿋하게 따라가 그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모습을 함께 했다. 그가 보고 있기를 바라면서. 적어도 이제는 당신의 손녀가 어디쯤 서 있는지 한 번에 찾아낼 수 있는 밝은 세상에 가 있기를 바라면서.
가끔 친구들과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 어쩐지 그들 중 친할아버지와 친하다고 말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왜 세상에 할아버지와 친한 손녀는 찾아보기 힘든 걸까. 일단 나부터도. 일반적으로 '할아버지'란 어떤 그림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걸까. 적어도 나처럼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나, 점자나, 허공을 더듬는 손 같은 건 아닐 테지.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점자로 오돌토돌하게 적힌 일종의 글자들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그것들을 읽어 내려갔을 나의 할아버지를 상상해보았다. 너무 안타까웠을 그의 노년과, 알 수 없는 미안함이 지하철의 번잡함에 섞여 여기에서 저기로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