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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May 04. 2019

경박한 사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주 얇고 옅게 알았다



경박한 사이


- 카톡


알람이 울렸다. 보나 마나 S일 것이다. 대학 동기 S는 꼭 이렇게 애매한 시간에 카톡을 보낸다. 직장인이 된 이후로 쭉. S가 스물다섯에 취직했고 우리가 지금 서른셋이니 꼬박 9년째다.


- 리끼코. 뭐 해. 나 졸려. 


지구에서 나를 '리끼코'라 부르는 사람은 S와 또 다른 대학 동기 L 딱 둘이다. 다릿살을 빼보겠다고 운동에 영혼을 팔던 대학시절 두 사람이 나를 놀린답시고 지어준 애칭인데 원래대로라면 '코끼리'가 되어야 하지만 그러면 너무 노골적이라며 지들 멋대로 단어를 뒤집었다. 내 허벅지가 코끼리 같다나 뭐라나. 단어를 꼰 이유는 남들이 단번에 알아듣기 어렵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는데 음절 순서를 바꾸는 바람에 오히려 무슨 뜻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렀다. 이 별명을 우연히 들은 사람들은 수 초 후에 반드시 푸하 웃음을 터뜨렸고 높은 확률로 내 몸을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흘겼다. S와 L 덕분에 나는 자주 길바닥에 전시되곤 했다. 망할 것들. 나는 이 별명이 싫어서라도 살을 빼고야 만다며 이를 갈았는데 어째선지 살을 빼나 찌우나 여전히 나는 날씬한 리끼코거나 통통한 리끼코였다. 십삼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들에게 어떤 리끼코가 되었을까. 늙은 리끼코라고 할까 봐 굳이 묻지는 않기로 한다. 


- 통화할래? 


2시 30분. 딱 졸릴 시간이다. 두 손을 데스크 아래로 삐뚜름하게 내려 몰래 핸드폰 액정을 두들기고 있을 S에게 답신을 보냈다. 우는 이모티콘이 즉각 날아왔다. 


- 지금 회사 분위기 안 좋아서 통화는 좀 그래. 옥상 올라가서 리끼코랑 수다 한 판 떨면 잠 확 깰 거 같은데. 


잉잉거리는 목소리가 텍스트에 부슬부슬 묻어났다. S는 얼마간의 연봉을 받는 대신 낮 시간을 회사에 저당잡힌 수 천만 직장인들 중 하나다.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언제든 침대에 드러누울 수 있는 프리랜서 신분이 된 나는 매일 2시 30분만 되면 S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1인으로 손쉽게 등극하곤 했다. 나는 S가 속한 팀의 인사이동 이야기, 근래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의 외모, 머지않아 결혼하는 또 다른 대학 동기와 관련한 여러 수다를 들어준 뒤 그녀를 다독다독 일터로 되돌려보냈다. 참새같이 쫑쫑거리는 걸 보니 확실히 잠은 깬 듯했다. 내 임무는 여기까지다. 


S 말고도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는 사람은 몇 명 더 있다. 사회에서 만난 K, 최근 공무원 공부를 시작한 L, 매일 퇴근길에 간식을 사다 줄까 물어보는 M, 인도 첸나이 거주자 Y. 이들은 대체로 누군가를 욕하고 싶거나, 혼자 있기 싫거나, 내가 보고 싶거나, 혹은 자기를 보고 싶어 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아 메시지를 보낸다. 덕분에 내 카톡창은 자주 방문객들로 붐빈다. 인기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시간이 많은 인간인 것이 이유겠지만 상관없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인기가 많은 사람보다 훨씬 매력적이니까.

 

우리는 카톡창에 마주 보고 앉아 K네 사무실의 박 과장이나, L의 3년 된 남친이나, M의 말 안 듣는 남동생을 야금야금 뜯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것들은 대체로 달거나 짜거나 맵기 때문에 어떻게 먹어도 맛있었고 그 자극적인 재료들은 종종 내가 쓰는 소설이나 수필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내 시간을 조금 꺼내어가는 대신 그들의 삶의 조각을 요금처럼 내려놓았고, 그러면 우리의 거래는 언제나처럼 만족스레 성사됐다.



새벽. 여행 중 만난 K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 자니?


좀 당황했다. 자냐니. 전형적인 구남친 대사 아닌가. 고민에 빠졌다. 새벽 2시가 넘었기 때문에 즉답을 하지 않을 핑계는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귀찮았다. 우리는 고작 여행 중에 만나 이틀쯤 동행했던 사이일 뿐이니까. 하지만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온 친구들의 사진에 빨간 하트를 무진장 눌렀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이 무슨 사진에 언제 좋아요를 눌렀는지 일일이 확인해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겠지만 어쨌거나 K의 피드에는 내가 고작 3분 전에 커피잔을 들고 예쁜척하고 있는 친구의 사진을 좋아한 기록이 최상단에 떠있을 것이다. 자는 척하기는 글렀다는 뜻이다. 결국 헐겁게 심호흡을 한 뒤 빨간 동그라미가 떠 있는 카톡 방을 벌컥 열어젖혔다. 


- 아니요.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연락한 무슨 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할 거라는 뜻이었지만 K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잘 지내지.


네 잘 지내죠. 오빠는요. 재미없고 뻔한 인사가 끝난 뒤 K는 가져온 말을 두서없이 꺼내 놓기 시작했다. 조금, 아니 좀 많이 취한 것도 같았다. 워낙 횡설수설이라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들은 결과 나는 K가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인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남자의 이별 고백을 들으며 미안하지만 '이걸 왜 나한테 말하지?'하는 생각을 잠시간 했다. 그것도 이 새벽에.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는 K의 지난한 결별 과정 보다 그가 수다 상대로 하필 나를 택한 이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건 잘 모르는 사람의 연애사를 듣는 것만큼이나 영양가 없는 짓이었지만 적어도 지겹지는 않을테니 아무런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K는 그녀와 헤어지던 날 아침만 해도 우리는 아무 문제 없었다는 이야기를 막 하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주 얇고 옅게 알았다. 나는 그가 선생님이라는 것. 키가 크다는 것. 방학을 맞아 인도로 잠깐 여행을 왔다는 것. 소가 이렇게 똥을 크고 높게 싸는 줄 몰랐다며 신기해했다는 것을 안다. 그는 내가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 키가 작다는 것. 인도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 소는 원래 똥을 광범위한 면적으로 싼다는 걸 안다는 정도를 안다. 우리는 함께 했던 시간이 짧았던 만큼 가늘고 야들야들하게 서로를 알았다. 그래선지도 몰랐다. K는 지금 자기를 아주 조금만 아는 사람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서로의 세계를 넘나든 적 없는 사람. 소문날 일도, 소문이 좀 나더라도 큰일 날일 없는 확실한 타인. 너무나 가볍고 얇은 사이라 거침없고 야성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차하면 안 봐도 그만인, 용건이 끝나면 손쉽게 쭉 찢어버려도 될 가볍고 옅은 그런 관계인 그런 사람. 


아지랑이처럼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말 구름표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모니터 저 너머에는 5년 된 연인의 세상으로부터 영구 추방당한 K가 있다. K는 말이 많다가 적었고, 적었다가 또 갑자기 폭포처럼 단어를 쏟아내길 반복했다. 그동안 나는 K가 여자친구를 무무라 부른다는 사실과, 무무와 함께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클)로바라는 사실과, 무무가 원래는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키우고 싶어 했는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 그녀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 K가 끊임없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무무도 모르고 로바도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K를 제일 모르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긴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그만두기로 한다. 괜한 위로로 다음 날의 그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에서 만난, 소똥 좀 밟아본, 키 작은, 선생님이 아닌 나인 채로 그의 말에 응응 맞아요, 그래 맞아요, 하며 기계적이지만 가장 인간적일 방법으로 그를 다독였다. K는 여전히 화면 위로 텍스트를 밀어 올렸고 두서없이 시작한 이야기는 맥락을 잃은 채 새벽을 둥둥 부유했다.  


그간 내 카톡창을 두드려온 이들을 생각한다. 아침에, 낮에, 낮과 가까운 저녁에, 새벽에 가까운 밤에 나를 찾아온 그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비밀을 공유하고, 그러면서 더 가까워지거나 도톰해졌다. 나는 너와 나 사이에 돈독하게 부피감이 생기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리는 행위만으로도 S를 알고, L을 위로하고, M의 고민을 나누며 살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다. 하지만 관계라는 건 사다리를 오르거나 튜브에 공기를 불어넣는 것과는 달라서 반드시 진전되거나 팽창해야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잘 몰라서, 별로 안 친해서, 앞으로도 친해질 필요가 없을 사이라 오히려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그런 관계란 것도 분명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 새벽엔 누가 나를 찾아올까 조금 기다려진다. 벌써 새벽 한 시지만 아직 새벽 한 시기도 한 시간. 더구나 오늘은 금요일이니 방문객이 조금 늦은 시간에 찾아올지도 몰랐다. 나는 까무룩 잠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핸드폰을 한 손에 꼬옥 잡고 있어보려 한다. 어쩌면 나와 도타워지거나 경박해지고 싶은 사람이 불금에 갑자기 내 카톡창을 콩콩콩 두드릴지도 모를 테니까.  






+덧) 며칠 후 K에게 다시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조금 민망한 말투로 최근 무무와 화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오 씨. 보자마자 육성이 터졌다. 내 이 인간을 확 그냥, 아주 그냥, 어!. 약간 핀잔을 하긴 했으나 결국은 축하였다.

- 술 좀 작작 처먹어요. 다시는 안 받아줄 거야. 어쨌거나 화해 축하해요. 잘 살아요 싸우지들 말고.

그렇게 돌아서다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에 '나 이거 소재로 써먹는다?'했더니 시원하게 그러란다. 기왕 쓸 거면 최대한 자세히 써줬으면 좋겠다고, 나중에 무무랑도 같이 보고 싶으니 꼭 그래달란다. 마음에 들려나. 그래줬으면 좋겠다. K 오빠, 무무님, 로바야, 앞으로도 행복하세요.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나중에 청첩장은 보내지 마세요. 우리 그만큼 안 친합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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