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마이마이

엄마는 영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짧은 말만 했다

by 서현지




살기로 결심할 무렵부터 이모님을 엄마라 불렀다. '저기요'나 '이모님'이라는 호칭은 어쩐지 여기 있는 사람을 저어기 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호칭을 엄마로 정한 이유는 우리말 '엄마'는 스리랑카 말로도 '엄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돌보는 저택에 살고 있으니 엄마라 못 부를 것도 없었다. 주방 이모는 나이가 그렇게까지 많진 않지만 어쩐지 엄마라 불리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엄마라 불릴 때마다 어딘가 부끄럽지만 기쁜 표정으로 도-터(daughter) 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영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짧은 말만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마이(my)'라고 지칭했는데 마이는 왠지 어떤 상황에서도 쓰였다. 음식을 차린 뒤 '마이!' 할 때는 '내가 이것들을 만들었으니 맛있게 먹거라'라는 뜻이고 식탁보를 가리키며 '마이!'할 때는 '내가 흘리면서 먹지 말랬지'라는 식이다. 그녀가 마이를 외칠 때는 어딘가 확신에 찬 표정이 된다. 히란은 엄마에게 아이(I)나 미(Me)도 가르쳐 보려 한 것 같지만 나는 엄마의 마이가 좋아 그냥 두었다. 왠지 엄마는 마이일 때만 진짜 엄마였다.


엄마는 객실을 돌보는 것 외에도 히란과 매니저의 끼니를 책임졌기 때문에 온종일 노동했다. 감자나 계란이나 조미료들은 수시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매일 바빴다. 물이 끓었는데 계란이 모자라다거나 마무리 단계에서 소금이 없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럴 때는 자주 심부름을 갔다. 나는 시간이 많은 데다 엄마보다 빠르기 때문에 그녀의 5분 대기조로 자주 이용되었다.


히란은 손님을 불필요하게 노동시켜선 안 된다며 자주 엄마를 혼냈다. 엄마는 식구끼리 뭐 어떻냐는 식으로 소심히 대든 모양인데 일본에서 동아시아식 마인드를 배워온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내는 방 값만큼 충분히 대우해줘야 한다는 히란과 친해지면 상관없지 않냐는 엄마는 자주 입씨름했다. 일하는 건 상관없지만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싫었기 때문에 엄마를 도울 때는 히란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그 몰래 밭에 나가 채소를 캐오거나 계란을 삶아주거나 이불 빨래를 해주는 동안 나는 엄마와 더 빨리 더 깊이 친해졌다. 그녀는 진짜로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엄마가 타인의 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바로 장을 볼 때다. 하이랑카에 필요한 식재료는 대부분 히란이나 매니저가 사다 주지만 그때그때 떨어지는 세간 살림은 엄마가 직접 채웠다. 세탁 세제나 밀가루나 계란은 무겁거나 들기 까다롭기 때문에 내가 자주 동행했다.



스리랑카 여행작가 서현지 (18).JPG



엄마와 타운으로 향할 때는 유독 말 거는 사람이 많았다. 엄마는 누와라엘리야에서 태어나 쭉 여기서만 살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동네 어른들은 엄마만 보면 쪼르르 달려와 이런저런 말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말하며 자주 웃었다. 한 번은 엄마랑 길을 걷다 어떤 할머니를 마주쳤는데 그녀는 뜬금없이 내게 할머니를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것도 안 숙인 것도 아닌 자세로 '하이~'하고 인사했는데 어쩐지 할머니가 무척 흡족하게 웃으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뭘 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엄마 옆에서 자주 이런 식의 두둔을 받았다. 너무 따뜻해서 가끔은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행동이 자랑스러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머지않아 알게 됐다. 엄마는 길에서 나를 발견하면 티나게 '도우터!' 하고 소리쳤고 하이랑카로 그녀의 진짜 도우터가 찾아온 날엔 아예 옆에 앉히고 놓아주질 않았다. 엄마의 딸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왠지 내 이름이 도우터인 줄 아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엄마는 외국인인 나를 좋아했고 외국인인 나와 친해진 스스로는 더 좋아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대접받는 기분은 꽤 괜찮았기 때문에 그녀가 부르는 대로 자주 불려갔다.


엄마의 도우터로 사는 동안 웃긴 상황도 빈번히 생겼다. 한 번은 혼자 타운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복권 파는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엄마 덕분에 알게 된 무수한 동네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아주머니가 건넨 건 빳빳한 일회용 복권이었다. 당첨되기만 하면 1억 쯤 거저 생길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뜬금없이 행운을 쥐여주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집에 돌아와 히란을 통해 통역해주니 엄마가 무척 좋아했다. 알고 보니 며칠 전 두 분이 사소한 문제로 다투셨단다. 평소 쪼잔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양반인데 무려 복권을 주더냐며 참 별일이 다 있다고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왠지 이 일로 두 분이 화해할 것을 백 프로 확신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깔깔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왠지 이 복권 번호는 죽을 때까지 맞춰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당첨돼도 한국으로는 못 가져갈 돈이었다.


엄마는 오로지 타밀어만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이따금씩 손님에게 험한 소리를 들었다. 하루는 누가 방문을 두들기길래 나가보니 엄마가 거의 우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 마이! 마이!


엄마는 가슴을 한 번 쾅 치곤 아래층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1층으로 내려가보니 키가 멀대같이 큰 서양 남자 하나가 잔뜩 화난 채로 서 있었다. 남자는 네가 여기 사장이냐며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화장실 휴지 좀 달라는 말을 다섯 번도 넘게 했는데 엄마가 들어놓고도 무시했단다. 급해서 어찌어찌 빌려서 처리하긴 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며 무섭게 따졌다. 남자가 따지는 동안 엄마는 내 후드티를 잡고 울었다. 나는 사장도 뭣도 아니었지만 그냥 들었다. 이 상황에 욕받이까지 없으면 왠지 큰일 날 것 같았다. 나는 녹음기처럼 '쏘리'만 반복했는데 남자의 빠른 영어는 거의 못 알아들을 수준이었기 때문에 반만 알아듣고 반만 기분 나빴다. 적당히 못 알아듣는 건 왠지 좀 좋은 것 같았다.


이날 저녁 엄마를 위해 작은 페이퍼를 만들었다. 하이랑카에서 자주 쓸만한 단어를 영어로 정리한 종이였다. 단어 선정은 내가 했고 발음은 히란이 타밀어로 적었다.

토일렛 페이퍼. 디너. 스푼. 프리. 블랭킷. 워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Speak Sri lankan, you bastard(스리랑카 말로 해 이놈들아)'라는 문장도 추가하고 싶었지만 히란이 말렸다. 엄마는 종이를 받고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워했다.


그녀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나날은 계속 이어졌다. 엄마는 여전히 '마이'만 할 수 있었고 히란 몰래 일을 시켰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다. 주는 것 없이 사랑받는 기분은 썩 괜찮았다. 내가 나인 채로도 썩 괜찮아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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