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의 ‘미운 모습’을 통해 내 안의 결핍 읽기
배우자의 사소한 말이 크게 꽂히는 순간
: 배우자의 ‘미운 모습’을 통해 내 안의 결핍 읽기
홍해 연안의 작은 마을, 이집트 다합에서 보름을 머물렀다.
남편은 매일 오전 스쿠버 다이빙 과정에 참여했고, 나는 아이와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수영하다 쉬다를 반복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점심쯤 남편이 합류하면, 함께 그곳에서 오후를 보내다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는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여행 전부터 알아본 요르단 고대 유적지 ‘페트라’ 투어.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기에는 부담스러워 현지에서 알아보려 했다. 문제는 준비 부족이었다. 현지에서는 투어비가 ‘달러’로만 결제되는데, 우리 손에는 유로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 후기에는 “투어차가 오지 않아 낭패를 봤다.”, “거금을 들였는데 서비스가 엉망이다.”라는 불만이 많았다.
믿을 만한 업체를 찾을 수 있을까? 무턱대고 가격만 보고 결정할 수도 없고, 모든 게 운에 달린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오후에 함께 업체들 다니며 알아보자"라고 제안했다.
"당신이 오전에 잠깐 가서 가격만 먼저 알아봐."
내가 영어가 서툴러 자신 없다고 하자, 그는 말했다.
"이집트 사람들도 다 잘만 하는데, 당신이 왜 못해?"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영어 좀 한다고 생색내는 거야? 치사하다, 정말!"
주변에 외국인들이 앉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물론 분위기만으로도 부부싸움이 난 걸 알 수 있었겠지만.
그 순간 폭발한 분노의 중심에는, 겉으로 드러난 말보다 훨씬 복잡한 마음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남편의 말이 얄밉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거든요.
바로, 영어에 대한 열등감과 불안.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남편의 태도 탓으로 돌려버린 것이지요.
저는 영어로 가격을 묻고 흥정해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긴장됐습니다.
'세 명 비용이 적은 돈도 아닌데, 잘못 말해 손해라도 보면 어쩌지?‘
그 순간, 영어에 대한 열등감은 순식간에 '사기당하기 쉬운 나'라는 왜곡된 자기 이미지로 변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실히 일하는 현지인들을 '관광객을 등쳐먹는 사기꾼'으로 보게 됐고요.
두려움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보자"라고 했지만, 남편이 제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는 억울함과 서운함이 함께 폭발했습니다.
"내가 오전 내내 아이를 보며 당신을 배려했는데, 왜 나를 배려해 주지 않는 거야?"
그 순간, 그동안 함께 쌓아온 시간이 단숨에 지워진 듯, 남편이 마치 단 한 번도 나를 배려한 적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이 모든 과정이 이뤄졌습니다.
이처럼 저의 불안은 남편에 대한 강한 의존욕구가 되었고, 그것이 거절되자 '무심함'으로 느껴져 화가 치밀었던 겁니다.
부부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서로 정서적으로 매우 가깝게 의지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도 그만큼 많고, 그것이 좌절될 때 미운 마음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부부는 사회적 규범이나 자녀 앞에 모범을 보이려는 압박 때문에 미움을 억압하기 쉬워요. 그러나 미움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힘을 약화시킬 뿐이죠.
중요한 건 갈등을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욱하는 감정폭발 대신 문제해결에 집중하려면, 무엇보다도 '상대의 다른 마음'을 함께 떠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합니다.
"내가 그때 화낸 건 혹시 손해 볼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처럼 보이지 않는 내적 의도를 스스로는 이해하고 있거든요. “경비를 잘 쓰는 건, 다 우리를 위해서잖아!”라고 합리화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상대에게는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근거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기 쉬워요.
다합에서 남편이 "당신이 먼저 가서 가격 알아봐"라고 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저는 그 말을 '내 불안과 두려움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무심한 태도'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남편의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거절 속에는 "왜 늘 내가 짐을 져야 하지?"라는 불만과 함께 '쉬고 싶다'는 바람이 숨어 있었습니다. 물을 두려워하면서도 도전했던 스킨스쿠버 과정이 남편에게는 이미 큰 긴장이었고, 그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저는 제 불안에만 집중했고, 남편은 자기 피로에만 집중했던 겁니다. 그렇게 내 의존과 그의 거절이 맞부딪히며 유치한 부부싸움이 벌어졌던 거지요.
만약 제가 남편의 의도를 먼저 떠올렸다면, 억울함과 분노로 맞서기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혼자 가면 손해 볼까 봐 걱정돼. 같이 갔으면 좋겠어. 근데 당신도 피곤하면 쉬었다가 저녁에 함께 가볼까?"
그랬다면 우리의 대화는 '유치한 말싸움'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대화로 이어질 수 있었을 테지요.
물론 저희 부부도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서운함과 미움이 쌓여도 말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고여 있다가 감당 못할 만큼 커져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은 터지고, 그 뒤에야 수습하며 문제를 해결해 갔던 적이 많습니다. 그렇게 뒷북치듯 부딪히고 풀어가면서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갈등 패턴에는 '애착'이 숨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 맺었던 정서적 유대 관계가 성인이 되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되는 것이지요. 애착불안 성향이 있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과도하게 애정을 요구하고 관계에 집착하게 됩니다. 반대로 애착회피 성향이 있으면 의존하거나 친밀해지는 것을 불편해하며 거리를 둡니다.
다합에서의 저는 전형적인 애착불안 반응을 보였습니다. "함께 가주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던 거죠. 이런 제 패턴을 알고 나니, 비슷한 상황에서 욱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아, 또 내 불안이 작동하는구나" 하고 한 발 물러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조금 더 편하게 남편의 밉게 보이는 모습 뒤에 숨은 다른 면도 함께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금세 다른 면이 보이지만, 때로는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한 번은 냉장고에서 오래된 야채를 꺼내며 남편이 "왜 신경을 안 썼냐"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순간 마음이 상했지만, 곧 장을 보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제대로 살림을 못한다고 나를 비난한다.’는 생각보다, 버려지는 재료가 아까워 속상해하는 그의 마음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 '상대를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라고 하지요.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대를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한 만큼 상대를 더 견뎌낼 수 있게 됩니다.
1. 상대의 다른 마음은 뭘까?
"당신이 먼저 가봐" = 무심함? 아니면 쉬고 싶음?
보이는 행동 뒤에 숨은 마음을 떠올리면, 억울함이 이해로 바뀝니다.
2. 내 불안이 투사된 건 아닐까?
"생색낸다"라고 느껴진 건, 내 영어 열등감이 만든 오해는 아닐까?
비난으로 들리는 말 뒤에는 종종 내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3. 감정 말고 욕구를 말했나?
"치사해!" 대신 "같이 가주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감정을 솔직한 욕구로 바꾸는 순간, 싸움이 대화가 됩니다.
※ 이 콘텐츠는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의 ‘2025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