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와 나 사이, 섞인 마음 구분하기
이에게 쉽게 실망하는 부모 심리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 때
: 아이와 나 사이, 섞인 마음 구분하기
로마에서의 어느 날. 남편과 아이는 숙소에서 쉬고, 나 혼자 오전 반나절 투어에 참여했다.
그 투어에는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온 가족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가이드 옆에 바짝 붙어 설명을 집중해 듣고, 질문도 술술 던지며 투어를 이끄는 듯했다. 가이드도 그 아이의 열정에 자극받은 듯 더욱 적극적으로 설명을 이어갔고, 그 뒤를 따르던 부모는 흐뭇한 미소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아주 많이.
'아, 저 가족은 여행 온 보람이 있겠다. 내 아이도 저랬으면...'
로마에서 본 그 여학생의 태도는 내가 늘 내 아이에게 기대하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실망을 겪곤 했다.
특히 아이가 꼭 타보고 싶다고 해서 어렵게 예약한 이집트 열기구 투어.
달러 환전부터 난관이었다. 유로밖에 없는 우리는 현지 여행자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달러를 구해 새벽 4시에 투어에 나섰다.
강을 건너 도착한 이른 아침, 열기구는 해뜨기 전에 떠올랐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고대 왕가의 무덤들과 황량한 사막, 몇천 년 전의 시간을 품은 이집트 문명. 나는 아이와 함께 그 풍경을 감탄하며 바라보게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열기구 안에서 웅크린 채 앉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청난 소리와 열기를 내뿜는 화염이 무서운가 싶어 다독였지만, 열기구가 다시 내려갈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아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무서워서 그래?"
아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말투마저 왠지 모르게 서운하게 느껴졌다.
'이걸 타자고 그렇게 말한 건 너잖아. 왜 아무 반응도 없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나는 아이가 풍경에 감탄하길 바라며 자꾸 말을 걸었다.
"저기 봐, 저게 왕가의 계곡이래!"
"와~ 해가 뜬다. 보여?"
"우와, 저 아래 봐! 이집트에는 사막뿐일 줄 알았는데, 나일강 덕분에 푸른 농지가 펼쳐져 있어."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고 과장된 몸짓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아이의 반응을 끌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이는 그 기대에 반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조용히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내 감정과 노력을 거절당한 것처럼 느껴졌고, 실망은 점점 더 커졌다.
비싼 만큼 정성껏 알아보고, 어렵게 달러까지 구해 준비한 투어. 아이가 분명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단순히 서운한 수준을 넘어 제가 쏟았던 마음마저 외면당한 듯한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일은 여행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아이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차렸는데 “안 먹고 싶어”라는 말에 서운해지고, 새 옷을 사줬는데 “이건 별로야”라고 하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처럼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 짧은 한마디, 무심한 표정 앞에서 저는 제가 쏟은 시간과 마음까지 부정당한 것처럼 느꼈고, 제 정성을 외면하는 듯 보여 서운해졌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심리적으로 깊이 연결된 존재이기에, 서로의 감정이 자연스레 뒤섞이기 쉽습니다. 아이를 '나의 일부'처럼 느끼며, 아이의 감정이나 행동을 곧 제 감정의 연장처럼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제 자신의 기대나 욕망이 아이의 마음 위에 덧씌워지기도 하고요.
“하늘 위에서 저 웅장한 풍경을 보면, 분명 감탄할 거야.”
이건 사실,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제 기대였습니다.
저는 아이가 감탄하길 바라며 말을 걸었지만, 아이는 오히려 더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제 기대가 아이에게 ‘압박’으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걸.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현상을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이는 자신의 감정이나 기대를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반응하게끔 무의식적으로 유도하려는 심리적 기제입니다. 결국 상대를 내 기대에 맞춰 조종하거나 통제하려는 무의식적 욕구가 담겨 있지요.
저 역시 “이 풍경을 보면 감탄할 거야”라는 기대를 아이에게 넘기고, 그 기대에 맞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아이의 감정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 기대가 아이에게 심리적 압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 바로 투사적 동일시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실 이집트 룩소르에서의 열기구 투어는 저 역시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비용에 망설였고, 예전에 보았던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장관과 비교해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결국 움직인 건, 아이의 “꼭 타보고 싶다”는 말이었지요.
결정의 계기는 아이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제 욕구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실제로 열기구 위에서 내려다본 유적지는, 제가 기억하던 카파도키아의 풍경만큼 인상 깊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얼마 전 로마에서 보았던 화려한 신전들과도 비교돼 한층 밋밋하게 느껴져, 4,500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런 실망감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 순간, 아이가 감탄이라도 해주었다면 제 실망은 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 역시 말없이 웅크린 채 있었고, 저는 점점 커지는 실망을 아이의 반응 탓으로 돌렸습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왜 그렇게 실망했을까?'
'정말 아이 때문이었을까?'
곰곰이 들여다보니, 그 실망은 아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고, 기대도 컸는데…'
바로 제 마음, 충족되지 못한 제 욕구가 실망을 키운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무산된 제 기대의 좌절감을 아이에게 덧씌운 셈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이의 반응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내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을 보여도, '아, 여기엔 내 기대가 있었지!' 하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죠.
물론 지금도 실망스러운 순간은 찾아오지만, 이제는 실망의 화살을 아이에게 돌리기보다 내 안을 살펴봅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이와 나 사이에 섞인 마음들을 구분합니다. 그 사이에 생긴 작은 틈, 그게 바로 우리의 관계를 지켜주는 건강한 경계가 되니까요.
지금도 저는 아이가 그 순간 왜 그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화염이 무서웠을 수도 있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피곤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른들은 알지 못하는 아이만의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을지도 모르죠.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마음이 있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1. 지금 이 기대는 아이의 마음인가, 나의 욕구인가?
마음을 구분하면, 일방적인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어요.
2. 아이의 솔직한 표현을 내 마음의 거절로 받아들이고 있진 않은가?
마음을 구분하면, "안 먹고 싶어"를 "그래, 지금은 별로 안 당기는구나"로 받아주는 게 가능해요.
3.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 이건 내가 원했던 거구나"를 바라보면, 아이에 대한 실망감이 줄어들어요.
※ 이 콘텐츠는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의 ‘2025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