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탁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 다섯 가지 덕목을 알고 실천하면 현대 사회에서도 최소한 어떠한 형벌도 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우리 조상들은 댓 구를 맞춘 것인지 몰라도 5가지의 형벌, 즉 태장도류사(笞杖徒流死)의 오형(五刑)을 법으로 정해 인의예지신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벌해왔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 누군가는 통제를 하고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인의예지신을 실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본성이 그다지 착하지 않은 사람도 간혹 섞여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일을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하지만, 예전에는 왕과 한 줌의 신료들이 했다. 도덕적 정당성을 정치의 근원으로 한 덕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는 덕(德)이 가장 높은 사람이 하늘에서 내린 왕이 되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어쩌다 가뭄이 들어 농사라도 망치게 되면 왕은 기우제를 지내며 자신이 덕이 모자란 탓이라 책망한다. 하지만 비는 언젠가는 꼭 내릴 수밖에 없으니 결국 왕은 덕을 쌓은 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주와 통하는 왕이어도 형벌을 내리는 일에는 대단히 신중했다는 것을 우리는 태장도류사(笞杖徒流死) 형벌의 구성과 그 적용을 통해 알 수 있지만,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인 회초리와 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은 샤리아 법을 적용하고 있는 이슬람 국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현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인권 선진국인 한국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긴 하나, 내 세대에서는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법전에는 없어도 활발히 살아있던 실존법이었다. 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지만 태형과 장형이 난무하던 시절의 기억이 허황된 생각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좋은 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태장도류사 중 아직도 생생하게 게다가 더 강력해진 처벌로서의 형(刑)이 살아있으니, 바로 유형(流刑)이다. 사형조차 이미 의미를 잃은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아 진화 발전하고 있는 형벌인 것이다.
오형(五刑) 중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유형(流刑)은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유배형으로 먼 지방으로 추방되는 것인데, 옛날에 유배형을 받아 귀양을 가는 사람들은 대개 지식인들이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대표적으로 사대부를 생각할 수 있겠다. 그들은 땅을 일구는 사람도 아니고 상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왕과의 거리, 관직 네트워크, 학문적 교류, 그리고 제자, 동문, 사림들과의 관계와 기억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거하는 유배형은 단순히 직업의 상실이 아닌 존재 방식의 파괴라고 할 만큼 무거운 형벌이었다. 다시 말하면 살려는 두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형벌이 언제 끝날 지도 알 수 없어 어찌 보면 유배형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형보다 더 견디기 힘든 형벌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법전에는 금고형 같이 유사한 형태의 형벌이 있으나 관계를 절단해 버리는 형태의 근본적인 유배형은 없다. 다만, 살아있는 것 같아 보인다. 조선이 사람을 변방으로 보내 처벌했다면, 지금 우리는 사람을 중심에서 지워버린다. 조선은 지도 위에 선을 긋고, 숫자를 적고, 바다를 건너게 했지만,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유배는 주소는 그대로인데 자리는 비어있고 무대는 불이 꺼지며 무관심 속에 사라진다. 쉬운 예를 들자면, 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자숙하겠다는 연예인들은 프로그램과 광고에서 사라지고 SNS에서 조차 차단을 당해 결국 무관심의 대상에서조차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존재는 유지되지만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이 사림과 같은 지식인은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존재 가치 역시 관계와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유배형이 풀릴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조선에서는 왕이 몇몇 신료와 협의를 하여 이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유배를 풀어 복권을 시켜 주기도 했다. 유배가 풀릴 때까지 죄인들은 그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신과의 대화에 열중하여 글을 쓰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혹시 <때가 되면> 복권이 될 수도 있었다. 현대의 유배형은 이 점에서 많이 달라서 유배에서 풀어줄 왕과 신료가 없다. 오히려 무기나 사형 선고를 받고 감방에 들어가 있으면 정부로부터 <때가 되어> 특별 사면을 받아 낼 수도 있다는 기대에 감방 안에서도 안하무인인 인사들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현대의 유배형은 누가 풀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배형을 내린 사람들도 변하고 스스로 유배를 자처했던 사람들도 변하는데 그 <때>가 잘 오지는 않아서 스스로 유배가 끝났다 싶어 머리를 들면 또 너구리 잡듯이 망치로 내려쳐진다. 물론 여론이라는 형체도 없는 것이 망치가 되는 데, 그런 이유로 아직 유배가 끝나려면 멀었다 싶은 사람들도 별문제 없이 유배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풀려나 새로운 관계와 기억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세력 싸움에 불과하며, 여론이라는 것은 나의 뜻과 같지는 않아도 나를 쉽게 집어삼킨다. 나와 다른 여론이라는 것이 나를 삼키는 순간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이 또한 유배형에 처해지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은 커다란 사회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먹고 자고 일하고 월급 받고 노는 일 모든 것에 걸쳐 일어난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인의예지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