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탁류
외국어를 몰라서 가장 답답할 때는, 말의 뜻은 알겠는데 그 쓰임새와 뉘앙스를 가늠할 수 없을 때다. 요즘은 AI가 즉각 통역을 해주기 때문에 외국어를 몰라도 대체로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미묘한 기운, 말하는 사람의 태도나 숨은 의도를 읽어야 할 순간에는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AI가 발전을 거듭한다 해도, 당분간 전문 번역가가 꼭 필요할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다.
인도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사소통 자체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인도 사람이 영어로 말할 때의 뉘앙스를 이해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인도식 영어 발음은 한두 달이면 익숙해지지만,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을 잡기까지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른바 “노 프라블럼(No Problem)”과 “액추얼리(Actually)”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정말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면 그 말은 어느새 “액추얼리, 빅 프라블럼”으로 바뀌어 있다. 인도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장면일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의 표면적 의미만 믿고 지나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영어는 그나마 어느 정도 익숙한 언어이기에 큰 문제로 번지지 않는 편이지만, 일본어는 늘 나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언어다. 일본 사람을 자주 만나본 것도 아니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지만, 일본은 늘 우리 곁에 있다. TV 속에서, SNS 속에서, 그리고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마주친다. 통역을 통해 또는 일본사람이 자기가 한 말을 영어로 설명하거나 한자를 써서라도 말의 뜻은 전달되지만, 그 의미가 선뜻 와닿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말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많이 다른 느낌이 드는 이유다.
예를 들면 일본어 쿠야시이(悔しい), 흔히 ‘분하다’로 번역되는 말이 그렇다. 스포츠 경기에서 패한 일본 선수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 그 의미가 늘 궁금했다. 졌으니 아쉬운 마음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예의에 민감하다고 알려진 일본인들의 표현으로는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의 복싱 선수가 시합에서 지고 “분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억울함이나 분노, 심지어 판정에 대한 불복까지 내포한 말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 공정한 심판 아래에서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결의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래서 ‘분하다’는 표현은 스포츠맨의 말치고는 다소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다르게 이해하기로 했다. 쿠야시이는 상대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준비가 부족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 계획대로 해내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 그리고 더 노력하겠다는 다짐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쓸데없이 마음만 복잡해지고, 상대를 오해한 채 스트레스만 쌓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인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느낄 법한 우리 표현도 있다. 일본어에서 온 ‘진검승부(眞劍勝負)’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일상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무슨 일이든 목숨을 건 것처럼 임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나 진검승부란 본래 진짜 칼을 들고 생사를 걸고 맞서는 상황을 가리킨다. 겐페이 전쟁과 같은 일본의 내전 시기, 서로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던 사무라이들의 세계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전쟁이 아닌 한 그런 의미의 승부를 벌이지 않았다. 승부를 보더라도 목검을 사용했지, 실제 칼을 들고 죽자고 싸우는 문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몇몇 일본인에게 물어보니 정작 일본에서는 <신켄쇼부(真剣勝負)>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무겁고 과장된 느낌이 있어서라는 것이다. 그런 말이 왜 한국에 와서는 왜 이렇게 흔한 표현이 되었을까... 어쩌면 유치원 입학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무엇이든 전쟁처럼 받아들이게 된 사회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 말이 일본어이니 쓰지 말자고 할 수는 없다. 방송에서 ‘진검승부’ 대신 ‘목검승부’를 쓰자고 주장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이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사용하는 것과 모르고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구 경기에서 두 사람씩 한 편을 먹고 치는 상황을 가리켜 아무렇지 않게 “겐페이를 먹고 치자”고 말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겐페이는 일본 헤이안 시대에 벌어진 원(源)씨와 평(平)씨 가문의 내전, 즉 겐페이 합전(源平合戰)에서 비롯된 말이다. 흰 깃발의 원씨와 붉은 깃발의 평씨가 맞섰던 그 전쟁을 떠올리면, 놀이와 스포츠에 쓰기에는 다소 무거운 말이다. 일본 NHK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 역시 그 전쟁을 모티브로 한 이름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일본 문화에는 전쟁의 기억이 비교적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반면 우리의 역사에서는 전쟁이 늘 최후의 수단이었다. 신라의 경순왕이 백성의 팔과 다리를 길에 흩뿌릴 수 없다며 전쟁을 포기하고 나라를 고려에 넘긴 일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다른 문화와의 교섭과 협상이 일상이 된 시대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 분명하지 않으면,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휩쓸리기 쉽다. 그리고 그 생각의 출발점은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다. 스포츠나 놀이마저 전쟁처럼 치러야 하는 사회는 조금 숨이 막힌다. 가끔은 숨을 고르고, 숨 좀 쉬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