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가 나에게 하는 말

수석침류

by 초부정수

제리는 3년 전에 우리 식구가 된 반려견이다. 내가 주 보호자는 아니고 딸들이 주 보호자이지만 나는 내가 제리의 아빠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나의 기대일 뿐이다. 무릇 아빠라면 제리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서 더 좋은 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책임이지만, 내가 개의 말을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니 그 책임을 다 할 수 없다. 어쩌면 반려견 훈련사인 강형욱 씨는 개의 언어를 구사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가 사람 말을 하는 개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말이다. 하여간, 제리와 소통을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과는 제리가 나의 말을 알아들어 주는 선에 머물러있고, 아직도 나는 제리가 하는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래도 최소한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할지 싶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소한 제리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앉아"는 앉는 것이고, "엎드려"는 엎드리는 것이며 기다리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 간식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알아듣고 더 맛있는 간식을 먹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안다. 동물들은 오직 본능을 따른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제리는 어스름한 잠이 들었을 때 뒤에서 손을 대면 뜬금없이 무는 본능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행동에 옮긴다. 즉,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인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때 제리는 역시 오성(悟性), 즉 깨닫는 능력은 별로다. 간식을 생각 없이 계속 먹다 보면 강돼지가 되어 관절에 무리가 간다는 것을 골백번 이야기해도 깨닫지 못한다. 더 나아가 여자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것 또한 깨닫지 못함은 가히 안타깝다는 말로도 충분치 않다. 대화란 서로를 이해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인데, 내가 개의 언어를 모르니 안타깝다고 하기에는 나의 미숙함이 너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꼭 필요한 것, 즉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칙과 관습, 그것들과 관련된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 예를 들면 짖어도 좋을 때와 아닐 때, 짖어도 되는 상대와 아닌 상대를 구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하는 말의 뜻을 내가 이해하는 대로 이해하고 최대한 지키려 노력한다. 이것은 마치 축의 시대에 현자들이 인간들의 삶을 정의한 대로 우리가 살아온 것과도 같아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평화로움 속에서 행복하게 지낸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제리와의 삶은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데,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척 궁금해진다. 호프만스탈은 <찬도스 경의 편지>에서 "언어가 내 손에서 부서져 내린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언어와 의미의 붕괴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그 당시 유럽 정신 구조 자체의 균열을 말한다고 한다. 즉, 도덕과 규범은 선과 악의 기준이며, 종교는 세계의 궁극적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어는 모두가 동의하고 공감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는데, 20세기 초 유럽 사회에서 그 믿음이 급격히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호프만스탈은 언어와 의미의 붕괴로 표현했다. 그러한 현상이 시대의 탓인지 사람의 탓인지 애매할 수 있으나 따지고 보면 시대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 사람 탓이라 해야겠다. 그러면 혹자는 그것을 세대차이에 의한 사회변화라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호프만스탈과 같은 비평가를 수구꼴통이라 몰아 부칠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기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을 지금 나는 제리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느끼고 경험하는 중이다. 간단한 예로 "공정(公正)"이라는 단어 하나로 우리 사회는 최근까지도 혼란을 겪었다. 공정이라는 단어의 뜻은 누구나 알지만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것인데,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평등이고, 누군가에게는 결과의 평등이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게는 경쟁의 공정성을 의미하기도 하여 특권 철폐를 이야기한다.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몇 해전 가을, 광화문과 서초동의 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누군가는 검찰개혁을 외쳤고, 누군가는 입시의 불공정을 말했다. 또 누군가는 도덕성을 문제 삼았으며, 누군가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끝나지 않는 부동산 문제와 관련한 "공급"과 "규제"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로 정부는 공급 확대를 말하고, 시장은 규제 완화를 말하며 청년은 기회를 말하지만 서로 닿지 않는다. 한 때 집은 비를 피하는 공간이었고 아이를 키우는 장소였으며 퇴근 후 불이 켜지는 창문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이 있는데, 그 집이 자산이 되는 순간 집을 사는 것은 살 곳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포지션을 잡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집을 투기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는 생존 전략을 부정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두가 "공정"을 말했지만 그 말은 하나의 뜻으로 모이지 않았다. 문제는 특정한 한 인물도 하나의 제도도 아니었다. 그저 "공정"이라는 말이 더 이상 모두의 언어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더 깊은 균열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현실인 사회에서 제리는 나를 이해시키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공감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며 인생과 견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임을 제리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