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창경궁로라는 길 이름이 좀 어색하네."
데이비드의 기억에 창경궁은 없었다.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도 지금의 창경궁은 창경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해야 하는 길 이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이어서 길 이름이 주는 무게가 다소 버겁다.
창경궁(昌慶宮)은 창덕궁(昌德宮)과 담장 하나 넘어 닿아 있는 궁이다.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동쪽에 있다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東闕)이라 불렸다. 특히 창경궁은 1484년 (성종 15년)에 왕실 식구들이 많아지자 대비마마(大妃媽媽) 등 왕가의 어른들이 조금 더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궁으로 다른 궁들과는 구조도 조금 달라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은 동향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식민정부는 창덕궁에 있던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본래의 모습은 10 퍼센트정도만 남아있어 그림인 동궐도(東闕圖)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냉면과 커피로 즐거웠던 분위기가 창경원 서사로 잠깐이지만 무거워지자 필립은 화제를 바꿨다.
"원래 교도소 간수 생활 10년이면 5년 감옥살이한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운영되던 시절에 5대 궁을 지키는 수위도 못지않게 고생이 꽤 심한 직업이었다고 해. 와중에 창경원 수위가 가장 좋은 보직이었다고 하더라."
“창경원은 동물들 냄새나고 관리도 다른 궁보다 더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냥 술만 가져오면 된다는 것이지. 창경원 시절에 토요일에는 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지금과 달리 그때는 토요일에도 근무를 했고, 달리 놀러 갈 장소도 많지 않아 일요일에 사람들이 코끼리 보려고 창경원으로 몰려들었지. 나도 어렸을 때 할아버지 손잡고 창경원에 밤 벚꽃 놀이 왔던 사진이 있더라고. 일본이 일본 정신을 심는다며 창경궁에 1,800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었거든. 하여간, 나같이 구경온 사람들은 많은데 동물들이 배가 부르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토요일의 동물 먹이는 프라이팬 하나만 있으면 좋은 안주가 되었다는 것이지. 생각해 보면 참 없이 살았던 시절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니야.”
"하긴, 요즘 같으면 동물 먹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지는 않겠지. 또 그래서도 안되고. 하지만 또 시대에 따라서는 그런 일들이 꽤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네."
"우리 입장에서 지난 일이라 그렇지 당시에는 그리 낭만적인 일이었던 것만은 아닐 거야."
대화를 하며 창경궁로를 따라 북쪽으로 걸음을 놓다 보니 어느새 편안한 돌담과 다른 궁의 정문과 달리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윽한 기품이 느껴지는 홍화문 앞에 다다랐다. 이곳이 동물원이었다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았다.
“ 이 문 앞에 서니 마음이 잔잔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또 고독한 기분도 들어 이상하다."
"그런 느낌이 들긴 하지 여기가. 이곳도 많은 이야기가 얽히고설킨 곳이라서 아마 주위의 기운이 다를 수도 있어. 지금처럼 고요하고 잔잔하기만 했던 장소도 아니고. 오전에 광통교에 갔을 때 본 것 중에 이곳과 관련된 것도 있었는데 뭔지 알겠냐?"
"전혀 모르겠는데, 신덕왕후의 신장석이 거꾸로 박혀있던 것 말고 또 뭐가 있었나? 신덕왕후는 창경궁이 생기기 전 사람이니 관련이 전혀 없잖아?"
"생각해 보면 광통교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몇 개 있을 거야. 그중에 한 개에 글자가 적혀있지. 한자로 적혀있으니 넌 물론 읽지 못했을 것이고.."
데이비드는 기둥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했지만, 그 기둥에 글자가 적혀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둥이 있다고. 영조대왕이 경진년(1760년)에 청계천의 홍수 조절을 위해 청계천 바닥에 쌓인 흙을 긁어내는 대규모 준설 공사를 한 후 세운 것이야.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어 청계천 관리를 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만약 이 글자 위로 흙이 쌓이면 관리를 안 한 것이니까 바로 인사조치를 했다고 하지."
“흙이 쌓이면 인사조치를 한다는 것이 뭔 소리야?”
“그 당시에는 도로포장 같은 것 안 했을 것 아니냐. 비 오면 산에서 흙도 쓸려 내려왔을 것이고 지금처럼 파이프를 별도로 묻어서 치수 사업을 하지도 못했지. 그런 흙이 쓸려 내려와 쌓인 상태에서 폭우가 내리면 당장 범람을 하여 피해가 막심했다고 해.”
“당시에 개천 주변에 집들도 대부분 초가였다면 홍수에 인명과 재산 피해가 심하기는 했겠구나. 그 당시 준천(濬川) 사업이라는 것이 지금 이 정도의 규모의 하천 관리를 한다고 생각한 것보다는 엄청난 규모의 국책 사업이었던가 보네.”
“2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해. 아마 그 당시 한양 인구가 20만 명이 채 안 됐는데 말이지."
"그럼 백성들의 불만이 말도 못 했겠네. 2003년이던가... 청계천 복원 사업할 때도 보니까 반대 시위가 엄청나던데. 아무리 왕이 시킨다고 해도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그랬지. 그런데, 영조가 그런 백성들을 이 홍화문 앞에서 직접 만났다는 거 아니냐. 만나서 준천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백성들과 토론을 했다는 거야. 그때 어떤 백성이 청계천 준천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고 반대 의견을 말하니, 영조가 오히려 상을 내렸다는 것이야. 준천 사업뿐만 아니라 군역이나 세금과 관련된 균역법(均役法) 걑은 정책에 대해서도 바로 이 홍화문 앞에 한성부 백성들을 모아놓고 직접 설명을 하고 설득했다도 하더라."
"그건 좀 대단해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도 아닌 왕국의 왕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믿기 어렵지만, 영조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기득권을 가진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을 모두 설득하고 개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구먼."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민본주의라고 할 수는 있겠지. 유교 사상의 근본이 그것이기도 하니 전혀 엉뚱한 일은 아니었을 거야, 다만, 실제로 실행을 했다는 것은 대단하다 생각되는 일이긴 하다. 게다가 준천 사업에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모두 정확히 임금을 지급했다고. 왕실 내탕금까지 보태서 말이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있던데, 아닌가 보네"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주워들은 거냐? 사실 그런 말이 있기는 한데 내 생각에 그건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인 것 같아.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일단 궁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안에도 이야깃거리가 엄청나지."
"한복은 안 빌리나? 다들 빌려 입은 것 같은데.."
"됐고, 넌 미국시민이긴 하지만 65세가 안되었으니 천 원 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