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전당합각재헌루정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데이비드와 필립은 홍화문(弘化門)을 지나 명정전(明政殿) 쪽으로 걸었다.


남녀 외국인 대여섯이 한복을 어색하게 차려입고 명정전(名政殿)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남자들은 청바지 위에 왕의 곤룡포(袞龍袍)를 걸치고 정수리에는 관이 삐딱하게 얹혀 있어 위태해 보인다. 여자들은 조선시대 기생들이 입었을 것 같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전모(氈帽)를 역시 삐딱하게 쓰고 있는데 전모(氈帽) 아래로 복잡하게 딴 레게 머리와 치마 아래로 보이는 운동화가 전통적인 시각으로는 조화롭지 않으나 새로운 패션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은 한국 드라마 소재로 아주 많이 만들어졌던 장희빈, 인현왕후, 최숙빈 이야기로 유명하기도 하지. 시절에 따라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회상을 먼저 이해해야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사극 드라마 많이 봤지. 그래서인지 숙종은 지진희, 영조하면 이순재, 정조는 이서진이 생각나. 숙종이 영조의 아버지인데 자꾸 지진희가 영조인 이순재 아들 같아서 헷갈리는 거야… 그런데, 사도세자가 이곳 창경궁에서 사망했지?”


창경궁과 처음 대면하는 데이비드의 머리에 떠오르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었다.


"그렇지. 저기 명전전 왼쪽에 있는 문정전 앞이 비극의 장소라고 하더라."


"궁궐의 건물마다 이름이 다 있으니 구별은 하겠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네. 사람 이름도 아니고.."


데이비드는 명정전(明政殿)을 둘러보고 문정전(文政殿) 앞으로 걸음 했다. 두 전각(殿閣) 모두 밝고 바른 정치를 하는 곳이라는 뜻이라는 필립의 설명과 함께 꽤 아늑한 느낌을 주는 창경궁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이 일어난 곳이라고 믿을 수 없다. 또한, 홍화문 앞에서 백성들과 토론까지 했다는 영조가 어떻게 아들을 그토록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을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런데, 사도 세자가 죽은 게 정확히 언제냐?"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1762년이니까 청계천 준천 사업을 마무리하고 2년 후에 바로 네가 서있는 여기 문정전 앞에서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 왕은 시켜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어."


문정전 앞 뜰에 뒤주가 놓여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던 데이비드는 문득 어디선가 그 뒤주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을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과 세자빈(世子嬪)의 마음, 그리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영조의 마음이 하나같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울적하다. 필립의 팔을 잡아끌고 함인정(涵仁亭)이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을 지나 혜경궁 홍 씨의 침전이었다는 자경전터(慈慶殿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자경전 터라는 표지판이 서있는 곳에 전각은 온데간데없이 넓은 터에 나무만 자라고 있다.


tempImagekCIGn7.heic


“자경전(慈慶殿)은 원래 자경당(慈慶堂)이라고 했었다고 해.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창경궁에서 가장 높고 뒤쪽으로는 동궐의 후원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곳에 지었다고 하는데, 고종 때 화재로 소실이 되었다고 하네. 그리고 표지말의 설명과 같이 일본이 동물원으로 개조하면서 이곳에 왕실 도서관을 지었는데, 1992년에 철거한 해서 그저 이렇게 빈 터 만 남게 된 모양이구먼. 서울에는 이런 식의 표지석이 엄청 많아서 표지석의 도시라고 해도 될 지경이야."


"건물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있게 된 이유가 있겠지. 전쟁도 있었고, 개발도 엄청 했으니.."


"그래도 난 간혹 예전 건물들이 사라지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더라. 그것들도 다 역사와 우리들 이야기의 일부분이기도 한데 어쩔 수 없이 사라진 것들을 제외하면 어디까지 개발을 하고 어느 것을 남겨야 할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것 같아."


데이비드는 자경전터 앞에서 멀리 서울의 현대적인 빌딩과 궁의 지붕들이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기에 즐겁다.


“화재로 소실이 된 것은 안타깝지만, 어쩌면 자경전에 동물이 들어가 사는 운명을 맞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자경전과 자경당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야? 건물 이름을 바꿨다고 했잖아?”


"궁궐의 모든 건물에는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가지고 건물의 크기나 격을 알 수 있어. 대략 여덟 글자 정도만 알면 규모와 용도를 대강 알 수 있지.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


"전당합각재헌루정?"


"순서대로 전(殿)이 제일 크고 중요한 건물이라고 이해하면 될 거야. 임금님을 부를 때 전하(殿下)라고 하잖아. 합하(閤下), 각하(閣下)도 다 같은 맥락이지.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보면 이런 명칭을 붙여놓은 건축물들이 꽤 많아. 나중에 덕수궁에도 가보자고, 거기 가면 정관헌(靜觀軒)이라고 하는 멋진 카페 같은 건물도 있다구."


"그래? 그럼 나중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자.. 그런데, 그렇다면 왜 왕세자를 저하(邸下)라고 하는 거냐? 저자는 없잖어."


"저하의 저(邸)는 하우스를 뜻하는데, 나도 정확히 왜 저하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한자를 풀어놓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에 의하면 '从宀从至. 至,所止也(종면종지. 지, 소지야)'라고 설명을 하더라고. 지붕에서부터 지(至)까지라고 하면서 여기서 지(至)는 멈추는 곳이다라는 말인데 이게 당최 뭔 소린지.. 아직은 왕이 아니니 그냥 집에서 멈춰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지내라는 건지.. 나중에 한문 잘하는 사람 만나면 물어보던지 하셔."


필립은 땅에 집 저(邸) 자를 써서 보여주며 저택(邸宅), 관저(官邸), 사저(私邸), 잠저(潛邸) 다 같은 글자를 쓴다는 설명을 하지만 데이비드는 잠저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잠저?"


“잠자는 집은 아니고, 잠저(潛邸)란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을 말하는 거야. 대통령 하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을 잠룡(潛龍)이라 하는 것과 같은 거지. 솔직히 잠룡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고 개인적으로는 별로야. 대통령이 왕은 아니지 않냐? 물론 용도 아니지만 말이야."


"뭐 그렇게 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한데, 또 오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단어가 가진 의미가 중요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은연중에 그 단어에 스스로 취할 수도 있겠다 싶네. 대통령은 물론 왕이 되어서는 안 되지. 근데 이제 뭐 좀 먹어야 하지 않나?"


창경궁 뒤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좋다는 생각도 잠시 데이비드는 배가 고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