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막걸리나 한 잔 하지. 친구도 한 명 불러서 같이하면 어떠냐?"
필립은 데이비드에게 친구를 한 명 소개해 줄 생각이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세 명이 술 마시기에 더 나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나야 좋지. 근데 안주는 뭘로 할 거냐?"
"빈대떡 어때? 길이 막힐 시간이니 걸어서 갈 만한 곳으로 가자구."
"막걸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성은 박이고, 이름은 이안이라고 하지. 이로울 이(利)에 눈 안(眼) 자. 영어로는 Ryan! 취미는 옛날 신문 뒤적이기 정도라고 해야 하나.."
아일랜드 이름을 쓰는 것을 보니 술은 잘 마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북으로 걸었던 창경궁로를 남으로 걸어 내려오는 길의 감상이 낮과는 조금 다르다.
"저기 가는 거냐? 광장시장?"
"그래, 예전에는 조금 더 시장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상업화가 되어서 예전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막걸리 한두 잔 하기는 괜찮아."
"시장이 상업화되는 게 당연하지."
"하긴 전통도 변하지 않으면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니까."
아직 이안이 도착하기 전이기만 둘은 빈대떡과 고기 완자, 그리고 막걸리 한 통과 사이다 한 병을 시켰다. 빈대떡 두어 점과 막걸리 두어 잔을 마신 데이비드는 흥이 오르는지 막걸리통을 들고 자기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야, 술을 뭐 혼자 따라 마시냐. 내가 한 잔 줄게."
이안이 빈대떡 집으로 들어오며 필립과 눈이 마주쳤다.
"잘 살고 있었냐? 미국 친구분이 이 분 이신가 보군."
"내 어릴 때 친구인데 데이비드라고 해. 미국에서 한 30~40년 만에 와서 이틀째 나랑 노는 중이야."
빈대떡과 막걸리의 힘인지 모르지만, 필립은 낯을 가리는 편인 데이비드와 이안이 마치 서로 알던 사이와 같이 허물없어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미국 분이 오셨는데, 기왕이면 미군이 마시던 막걸리를 대접하지 그랬어?"
이안의 말에 의하면 미군이 마시던 막걸리라는 것이 특정 브랜드가 있는 것 같았다. 워낙 막걸리의 종류가 다양하니 데이비드는 그렇다면 버번위스키와 비슷한 맛이 아닐까 싶다. 필립이 지평막걸리를 한 통 주문했다.
"이것이 이안이 이야기한 미군이 마시던 막걸리라고 하는 거야. 한 번 마셔봐라."
겉모양으로는 도무지 왜 미군이 먹던 막걸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흔한 영어도 적혀있지 않은 평범해 보이는 막걸리다. 이안은 데이비드가 어리둥절해 보이는 모습에 이래 봬도 이 막걸리가 100년 전통이 있는 브랜드라 설명하며 한 잔 따라준다.
"우리나라에는 사실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기업들이 별로 없지요. 임진년 전쟁을 비롯해서 한국전쟁까지 겪다 보니 가업이 많이들 끊어졌지만 이 막걸리는 그래도 100년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 흔하지 않은 브랜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왜 미군이 마시던 막걸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한국전쟁 당시에, 정확히는 1951년 2월에 경기도 지평리에서 프랑스 몽클라르 장군이 전투 지휘를 하는 동안 이 막걸리를 만들던 양조장에 군 사령부를 차렸거든요. 참고로 지평리 전투는 당시의 중공군 참전 이후 처음으로 중공군에게 이긴 전투였어요. 아마 그때 전투에서 이기고 이 막걸리를 마셨을 수도 있지요. 실제로 예전 막걸리 통에는 '미군이 마시던 막걸리'라는 글이 쓰여있었다고도 하더라고요. 본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프랑스 군이 마시던 막걸리가 아니고 왜 미군이?"
"외국인과 외군 문물에 어두웠던 당시에 보이는 외국인들은 그저 미국인으로 보였나 보죠. 사실 우리 어렸을 때도 그랬고.."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 술도 스토리를 알면 더 맛이 좋죠. 그럼 그런 의미에서 후래자삼배 하셔야지요?"
데이비드는 이안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 말을 써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너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냐? 뜻은 알고 하는 말이야?"
"당연하지. 뜻도 모르고 했을까 봐? 한국의 술 문화라고 하던데? 정확히는 여섯 잔을 드려야지. 너 세 잔, 나 세 잔, 안 그래?"
"저야 술 마시면 좋은데, 또 제가 법은 잘 지키는 편이라서 여섯 잔은 안될 것 같은데요. 하하하.."
데이비드는 술 마시는데 무슨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주도(酒道)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지만 법도 있다고요? 농담이시겠지?"
"그래 그건 나도 첨 듣는 말인데, 그냥 여섯 잔 마시지 그러냐? 막걸리가 좀 배가 부르긴 하지만 크게 취하지는 않잖아?" 필립도 법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실제로 있다고. 1929년에 청오(靑吾) 차상찬(車相瓚) 선생께서 ‘여(余)가 일반 국민(麴民)의 음복을 증진하고 국가(麴價)의 융창(隆昌)을 도모하며 세계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하여 이에 주국헌법(酒國憲法)을 반포(盤浦)하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총 29조의 법을 만드셨는데, 19조에 따르면 말이다.."
"주국헌법? 그런 법도 있다니?"
"들어봐. 그 헌법 19조에 따르면, 주회(酒會)에 지참(遲參)한 자는 후래자삼배 (後來者三盃)의 관습에 따라 처벌한다. 다만 특수지방에서 시행하는 소위 곡산 (谷山) 사돈복이 법은 너무 가혹하므로 이 법 발포일로부터 폐지한다. (곡산에서는 후래자에게 좌객 (坐客)마다 3잔씩을 주는 일이 있다)라고 명확히 되어 있으니 법을 따르자구…"
"하여간 이안이 이 녀석은 옛날 신문 뒤져보는 취미 때문에 별 이상한 이야기를 다 꿰차고 있으니 머리 아프겠다."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애처로운 이야기라고 해야지. 일제치하에서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논의도 못하고 얼마나 그 마음들이 답답했으면 이런 글을 썼겠냐? 주국헌법은 당시 대중 종합잡지인 [별곤건]에 실렸던 것인데, 나라 잃은 괴로움을 <술 나라>를 세워 잠시만이라도 현실을 잊게 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스토리가 있었다니 또 술맛이 달라지네. 이안 씨에게 내가 한 잔만 따라 드리고 저도 한 잔 받겠습니다. 주도에 따라서 말입니다."
"데이비드 넌 주도도 정확히 모르잖아? 사실 주도라고 하지 말고 주례(酒禮)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야. 주도(酒道)는 일본식 표현이라고."
"그래? 그럼 한 잔 하면서 이야기나 또 들어볼까? 건배부터 하고.."
막걸리 통은 비워지고 셋의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데, 돼지기름 냄새가 고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