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몰리 인도델리
벌써 세 시간째 딱딱한 벤치에 앉아 호출을 기다리는 중이다. 인도 내무부는 우리의 정부종합청사와 같은 Secretariat Building의 북쪽 블록_North Block의 동쪽 끝에 있다. 이 청사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1911년에 뉴델리를 인도의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면서 계획되고 지어졌다.
건축 양식은 인도 사라센 양식으로 19세기에 인도에 있던 영국 건축가들이 주로 사용했던 양식이라고 하며, 대개 붉은 사암을 사용하고 무굴 양식도 섞여있는 것 같아 보인다. 건물들은 크고 웅장하여 이곳에 오면 새삼 인도가 영토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힘 있는 나라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건물의 외양과 달리 내부는 사실 오래된 건물이어서 볼품이 없고 공조 시설도 미흡하여 델리의 뜨거운 여름에는 텁텁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KKP는 내무부 Joint Secretary로 치안 분야를 담당한다. 우리는 거의 1년 전 인도 델리 경찰청의 지능형 교통시스템 입찰에서 가격과 기술 평가 모두 1위를 했는데, 뜬금없이 독일 대사가 인도 내무부 차관인 RKS를 찾아가 유럽이 아닌 한국 회사에게 사업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항의를 한 이후 프로젝트 진행이 탈선한 기차처럼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눈에는 눈. 우리는 주인도 대한민국 대사님께 상황을 알려드리고 대사님은 인도의 내무부 차괌이 아닌 장관을 만나 독일의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설명했는데, 당시 인도 내무부 장관이었던 치담바람은 동 사안을 차관에게 직접 관리하여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라는 메모를 전달했다. 인도 정치인들은 메모를 잘 이용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것이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 같지는 않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원래 진행되었어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불협화음으로만 이루어진 도돌이표와 같아 시끄럽지만 늘 제자리다. 한국의 본사에서는 1,200억 원 규모의 국제 입찰에 성공했다고 믿었으나 지지부진한 진도에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승리에는 부모가 많다고 하듯이 일이 잘 되면 누구나 없던 역할도 만들어 자랑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고아가 많아져서 그 일에 관여했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 또한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짐에 따라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며, 결국은 모두 고생하고 선방했다, 또는 원래 시작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등의 애매한 자기 합리화로 마무리되어 언젠가는 곪아 터질 상처로 남는다.
몇 차례의 도돌이표를 거치고도 일 진행이 되지 않고 멈춘 곳에는 KKP라는 Joint Secretary가 있었다. 우리가 제출한 모든 입찰 관련 서류들이 그의 사무실 캐비닛 안에 들어가 있고,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어떻게든 KKP를 만나야 할 필요가 생겼다. KKP는 장관과 같은 정치인이 아닌 관료로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다 못해 자심의 생각만이 진실이라 믿는 타협이라는 전형적인 독불장군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태도는 늘 정부 내에서도 이슈가 되었지만, 그의 상사인 차관 RKS가 신임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몇 년 전에 KKP는 그런 그의 태도가 문제가 되어 강제 퇴직을 해야 했고, 인도에서도 꽤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되었다.
하여간, 그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결국 미팅 시간이 정해져 그를 만나러 온 날은 5월로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날이다. 인도 델리의 1월은 섭씨 10도, 2월은 20도, 3월은 30도, 4월은 40도, 그리고 11월까지는 40도 내외를 오간다. 간혹 50도가 넘는 경우가 며칠 있기는 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거의 4시간쯤의 시간이 흘렀을 때, 비쩍 마른 비서인지 차 심부름꾼인지 모를 사람이 나를 불렀다. 인도 사람들과 시간 약속에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이 정도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아무리 14억 인구와 관련된 내무부의 일이 많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이긴 하지만, 몇 개월을 무소식으로 기다려 왔는데, 이 정도 더 기다리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공무로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연락드린 것과 같이 델리 경찰청의 지능형 교통시스템 입찰 사업건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앉으세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무실은 그리 크지도 않고 특별히 다른 점도 없는 평범하고 다소 밋밋한 인도 공무원 사무실이다. 다만, 그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으니 그의 등 뒤로 말만 듣던 철제 캐비닛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안에 있다는 말이군....'
"그래 무슨 문제가 있나요?"
KKP는 자신이 너무 바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고 책상 위의 서류에만 신경을 쓰며 의례적으로 묻는다.
문제를 이야기하라는 것을 보니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다. 그때 복도에서 나를 부르던 비쩍 마른 아저씨가 인도의 짜이를 한 잔 들고 들어와 나누어준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설탕을 듬뿍 넣은 짜이는 취향이 아니지만, 그래도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되었다.
"우리가 그 입찰 참여를 했고, 아시는 바와 같이 이미 오래전에 최종 입찰 평가를 받아 사업자로 선정이 되어 정식 계약 체결을 하고 사업 진행을 할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LOI (Letter of Intent)나 LOA (Letter of Agreement)조차 체결이 안되고 사업 지연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원활한 진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뵙자고 헸습니다."
"무슨 계약을 한다는 거지요? 엉망진창인 서류를 제출하고 계약을 하겠다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이건 또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제야 눈을 마주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의 캐비빗 문을 드디어 열었다. 그런데, 그다음 그의 행동은 이상하리만큼 다혈질적이다. 우리의 제출한 입찰 서류는 7~8권 정도의 두꺼운 책인데, 그는 그 모두를 두세 번에 걸쳐 꺼내서 그의 책상 위로 집어던졌다. 그 책을 만드느라 밤새 대여섯 명의 인도 사람들이 사무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풀을 발라가며 제본을 한 바로 그 책을 집어던지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 당시만 해도 번듯한 복사와 제본을 하는 곳이 변변치 않아 수공예 스타일로 책을 제본하는 기술자들을 모아 입찰 전날까지 밤새 책을 만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던지면 다 망가지잖아요!"
"내가 직접 이 서류를 모두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읽어보았는데, 네다섯 가지 중대한 하자가 있단 말이요. 입찰 가격도 앞뒤가 안 맞고 말이지. 이런 엉터리 제안서가 1등으로 선정된 데는 분명히 무슨 부정한 일이 개입되었을 것인데, 책임자인 내가 이런 제안서를 가지고 계약을 해야 한다는 건가?" 이제 약간 반말투로 들리기 시작한다.
"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우리는 인도 중앙정부의 국제 입찰에 정식으로 참가했습니다. 인도 정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족해서 입찰 자격에도 문제가 없었고, 우리가 제출한 제안서는 다른 경쟁사와 똑같이 입찰 주관 기관인 인도의 국영기업 RITES에서 검토하고 평가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 RITES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소명을 했고, RITES에서 최종적으로 우리를 계약 대상자로 선정한 것으로 압니다. 이 과정에서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요?"
"바로 그거요. 어떻게 이런 제안서가 그 과정을 모두 통과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당신이 무슨 뒷 작업을 했을 건데 여기 와서 이러는 것 자체가 문제란 말이요."
'이쯤 되면 한 번 해보자는 것 같은데.... 이길 가능성은 없다...'
"어떤 부정한 일을 말하는지 모르겠고, 한국인인 나보다는 영국인과 독일 사람들이 인도 경찰청이나 RITES 책임자와 더 말이 잘 통할 건데,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까? 기본적으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도의 중앙정부가 주관한 투명한 국제입찰 사업에 참여해서 인도 중앙정부가 자체적인 판단하에 수행한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시간이 지연되면서 무려 1,200억 원에 대한 입찰 보증보험을 계속 연기해야 하니 아무런 결과도 없이 꽤 많은 비용이 발생하고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인도 정부에서 입찰을 파기해야 마땅한데, 아직도 그렇지는 않으니 입찰은 계속 성립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진짜 문제가 있다면 지금 여기서 한 번 서로 확인 작업을 해 보시죠. 평가 기관 사람도 참석하라고 해서 다시 한번 봐도 좋습니다."
"지금 <감히> 인도 정부에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가요?"
KKP는 감히라는 단어를 썼다. 역시 듣던 대로 그는 조금 특이한 성격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제가 어떻게 인도 정부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을 하겠습니까? 디만, 지금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렵고, 뭔가 정의(正義)가 조금은 뒤틀린 느낌이라는 것은 분명하군요."
"감히." 그는 또 감히라는 말을 썼다. "인도 정부에게 정의를 지키라고 하는 거요? 당장 추방 당하고 싶은가?"
추방을 하든지 말든지 별로 관심은 없으나, 더 이상의 이야기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추방을 당해야 한다면 그래야겠지요. 그래도 문제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니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생긴 것 같습니다. 다시 준비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4시간을 기다려 겨우 40 여분 정도의 이야기만 할 수 있었지만.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는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그 문제에 대한 답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자기 직속 장관도 못하는 일을 내가 할 방법은 없는데, 하필이면 당시의 인도에서는 정재계의 거물들이 모두 관련된 심각한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로 전국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일이 조금 더 꼬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때 일을 중단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편안해질 수 있는 명분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도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의 1차적인 결과는 우습게도 골프를 치지 않는 조금은 이상해보이는 한국인 주재원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