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기억의 주체가 바뀌는 시대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이야기는 잘 듣고 있는데,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향토 연구가도 아니잖아.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필립이가 취했나 보네. 갑자기 심각한 건 뭐여?"


"사실 이 분야에 전문가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필립의 말처럼 전문성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 이 정도로 토론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데이비드는 그렇다고 해서 못할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해 보고 설명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어쩌면 너무 먼 시간을 건너 돌아온 한국만의 고유한 냄새가 잊고 지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해서인지도 모른다.


"전문가들만 말하라는 법이 있나? 난 비전문가인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해봐야 할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지금은 소위 AI 시대잖아? AI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이미 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곳에 AI라는 말이 붙어있잖아. 이게 뭘 이야기하는 것 같어?"


"뜬금없이 AI는 뭐고, 그게 뭘 이야기한다는 거여? 솔직히 데이비드 너는 그런 신기술에는 젬병이잖아."


"젬병인 나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이전 기술들은 그 원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사용할 수 있었는데, AI는 내가 아는 것이 없고, 조금 과장해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그 놈들이 먼저 능동적으로 알려주니 얼마나 편한지 몰라. 그러니 시간이 한 두 해만 더 지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뭐 거의 사람과 비슷한 짓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럴까? 하여간, 그것들의 지능이야 이미 사람을 넘어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거고. 그렇게 지능이 높아진 탓인지, AI와 대화를 하면서 마치 AI가 감정과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한 것 같더라고."


"근데,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 지금의 AI는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제조데이터와 관계된 것들이 현실이고 지능이니 감정이니 하는 따위는 좀 먼 이야기 같은데... " 이안은 아직 AI라는 것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그저 사람의 머리와 몸을 모두 이용해서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엄청난 계산을 순식간에 해 치우는 뛰어난 컴퓨터 정도라는 생각이다.


"이안이 말대로 AI라는 것이 뭔가 기능이나 역할을 하려면 사람이 그 AI에게 특정한 목표를 주고 학습을 시켜야 하잖아? 예를 들면, 고성능 반도체를 개발하고 생산 수율을 올리기 위해서 AI에게 작업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사람이란 말이야. 그리고 수율이라는 것의 개념과 어떻게 해야 생산 수율이 높아지는지 알려주고 공부를 시키는 일도 사람이 하지? 그럼 AI란 녀석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학습을 해보고 수많은 제조 데이터를 순식간에 적용해서 성능과 수율을 최적화할 수 있는 반도체를 설계하겠지.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제조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이건 사람이 시키는 대로 AI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AI 보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해. 그렇다면 AI란 그냥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연장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뛰어난 컴퓨터 정도로 이해해도 되겠지. 그런데, 요새는 말을 알아듣는 AI가 있잖아?"


데이비드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는 듯싶다.


"그건 그래. 나도 최근에 통신사에 전화해서 상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내 문제를 상담해 준 직원이 사람이 아닌 AI라고 하더라고. 전혀 몰랐어."


"바로 그 점이란 말이여.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인공 지능이 지금도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될 정도인데, 그것들이 계속 학습을 할 거 아니냐... 어쩌면 사투리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유창하게 사람의 말을 하면 사람처럼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따지고 보면 생각이라는 것도 많은 정보와 지식이 서로 합쳐지면서 생기는 것이잖아?"


"이상하기는 한데, 또 영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러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새로운 생각이 나기도 하니까. 오히려 일부러 어떤 생각을 해내야지 마음먹고 생각을 시작하면 대개 잠이 오지. 그런데, 도대체 뭔 소리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 "


"어쩌면 꽤 빠른 시간 안에 세상의 모든 역사책을 AI가 쓰고, 사람이 배우는 세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그건 뭐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기록을 봐야 하는데, 우리만 해도 한문(漢文)을 이해 못 하잖아. 거의 모든 기록이 한자로 되어있는데 말이야. 지금 수준의 AI도 한문 정도는 금방 학습해서 이해하겠지. 그리고 온갖 언어로 번역을 해서 일종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닐 거야."


데이비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의심하던 필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화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역사란 정확한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 기록에 대한 해석도 중요한데, 내 생각으로는 그런 일들로 인해서 발생한 변화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 결국은 그것이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것 같단 말이야. 지금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해. 그것이 누구의 견해를 따르느냐 하는 것은 따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궁금한 건 누가 그런 것을 결정하고 기록할 것인가 하는 건데, 그게 최종적으로는 AI 일수도 있다는 것이지."


"흔히 하는 말로 역사란 승자의 것이라는 뭐 그런 거야? AI가 그런 짓을 한다? 아니, 왜 그런 짓을 하지? 그리고 AI는 사람이 목적을 주고 학습을 해야 한다며? 그럼 결국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을 주고 학습을 시켜서 책을 쓰라고 하는 것이면 결국 사람이 하는 일과 다를게 뭔가 싶은데? 그냥 강아지가 이쁜 짓 하면 간식을 보상으로 주면서 더 잘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이야기 했잖어... 지능이 엄청 빠르게 발전한다는 것은 결국 온갖 정보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미 AI는 사람의 말도 할 줄 알아. 그러면 생각이라는 것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할 수 있으면 더 나아가서 감정도 생기지 않을까? 그렇다면 AI에게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술이 취했나.. 왜 이 친구가 하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네.... 하긴, 생명이라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사람의 DNA도 복제나 조작이 되는 세상이니, AI라고 해서 감정이나 자의식을 가질 수 없다 단정 할 수는 없겠지. 감정이나 생각이 어떤 알고리즘에 의한 것이라면 말이야.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 성경인데, 그 성경조차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채택해서 엮은 내용은 서로 다르잖아. 예수님은 한 명인데 누군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기 나름의 알고리즘에 따라 편집한 것이니까.."


질문을 시작한 것은 필립 자신이었지만, 주로 대화는 데이비드와 이안이 하고 있어서 필립은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비약까지는 아닐 수 있겠다. 원시인들이 지능이 높아지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잖아? 그리고 그 생각에 대한 답을 지식과 지능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신을 만들었지. AI는 사람에 비하면 너무 똑똑해서 신을 만드는 대신 다른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 아니면 스스로 신이 되던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벌어진 일이여. 잘 보면 우리 주변에도 영향력이 큰 유튜버나 챗지피티의 말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더라고. 그것들이 하는 말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말이야... 그럼 거의 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 된 거지 뭐.."


이안은 대화를 통해 데이비드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다.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럼 근본적으로는 AI가 스스로 진실이라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럴 이유가 AI에게 있을까? AI가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고 일본에 의한 강제 적이고 반인류적인 조선 침탈이라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말이지. 사람들도 안 그러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AI에게 생각을 강요하고 감정을 가지게 하는 입력값 혹은 자극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잖아.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건 아니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것이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내서 자극을 주는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면 AI는 그것을 옳은 정보로 인식할 수도 있게 되는 것 아닐까? 그 정보의 진위를 떠나서 말이지. 황당해 보이는 유튜버들이 돈을 버는 방법을 그대로 AI도 따라 하게 될 것 같단 말이야."


"이미 그런 일은 현실이기도 한데... 당장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봐도 그렇잖아. 따지고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큰 잘못이 없이 자기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지만, 그들은 테러리스트로 각인되어 있고 땅을 빼앗은 이스라엘은 피해자이자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해 온 사람들로 이해되어 왔잖아. 최근에는 특이한 미국 대통령 덕분(?)에 사람들이 실체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 같지만, 결과는 모르긴 몰라도 미래에도 지금까지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 전 세계인들이 매일 클릭하는 SNS에 어떤 AI를 풀어놓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대개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풀어놓는 AI일 텐데, 팔레스타인은 그런 차원에서 이미 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확히 왜 갈등이 시작된 거지?"


필립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 정확한 갈등의 배경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일단 팔레스타인이 불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 너무 단순하지만 황당한 세 가지 사건이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분란을 일으키게 될 거야."




데이비드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겨우 3년 동안 벌어진 세 가지 일을 설명했다.


1. 맥마흔 선언 (McMahon–Hussein Correspondence, 1915–1916)

영국과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Hussein bin Ali) 사이에 오간 편지 형태의 외교 문서

영국은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면, 전후에 아랍인의 독립 국가 수립 약속


2.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Sykes–Picot Agreement, 1916)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비밀 협정

오스만 제국이 패전할 경우 중동 지역을 분할 통치하기로 약속함

팔레스타인 지역은 국제 관리 지역으로 설정, 나머지는 영국·프랑스가 각각 보호령 형태로 지배.


3. 벨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Lord Balfour)가 영국 유대인 지도자 로스차일드 가문에 보낸 서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국가적 터전(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힘.




"내용을 보면 영국의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라고 밖에 생각이 안되는데..."


"이 세 가지 사건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인 로렌스 대령에 대한 이야기는 허구가 많이 개입되었다고 해. 하지만, 사람들은 로렌스가 아랍을 깊이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한 영웅으로 생각하지. 실제로 지금 영국인들의 역사적 시각은 당시의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했던 필수적인 외교적 조치였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왕년에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었다는 영국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팔레스타인이 어디에 호소를 할 수 있겠나? 그냥 세계사에서는 테러집단으로 남을 뿐이겠지. 그리고 테러집단과 같은 자극적인 스토리는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마련이고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언급될 거란 말이구만. 그리고 그것들이 다 정보가 되어 AI의 지능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된다면 AI가 엉뚱한 방향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데이비드의 생각이고?"


필립은 데이비드가 우려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전문가가 아니어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가보지도 못한 팔레스타인은 둘째 치고, 한일 간의 모든 문제 역시 AI 시대에서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할 것만 같다. 특히 부모의 말보다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고 전문가의 말보다 AI를 신뢰하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시간을 준비해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날조된 식민사관과 같은 역사관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큼 충분히 자극적인데, 사람들이 진실에 관심이 없다면 욱일승천기로 디자인한 옷이 그저 멋지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치 독일의 상징인 갈고리모양의 십자가, 하켄크로이츠(Hakenkreuz)에 대해서는 반인륜적인 나치를 기억하는 많은 유럽인들이 존재하고 적극적으로 그 상징의 사용을 반대하니 전 세계 사람들이나 AI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 것인데, 일본의 욱일승천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군. 사실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욱일승천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거든."



이안은 아직 원래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던 일본인 세 사람 중 마지막 사람인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시작을 못했다. 역시 현재는 AI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이 영향을 미치는 AI와 미국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AI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주례(酒禮)를 가지게 될까? 술은 자작을 해야 한다느니, 손 윗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돌려 마셔야 한다고 하면 미국 AI는 이해를 하려나?"


"이안이 취했나? 가능한 이야기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AI에게 윤리 도덕 교육도 시켜야 한다는 말인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나? 말로는 AI를 못 이길 것 같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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