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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Sep 13. 2022

뷰 맛집, 당분간은 사진으로

쓰린 계단의 기억


 미운 네 살, 슬프게도 우리 집은 "네 살은 밉다"는 공식을 살짝 비껴가는 모양이다. 네 살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햇수로 쳐도 서너 달은 남았고 꽉 찬 네 살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다.

 아무튼 '미운'의 통상적인 개월 수를 앞당기며 얄밉거나 그도 아니면 슬쩍 모른 체하고 싶은 일들이 공회전하는 요즘, '미운 세 살'을 새로 쓰는 둘째의 자아가 예사롭지 않다.


 그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반드시 자신의 손을 거쳐야 하는 점이다. 매사 호기심 넘치고 진취적이며 독립적인 성향으로 고이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모성애마저 그건 그냥 고집일 뿐이라고 일러주는 현실이란.


 병원 진료 후 받은 비타민의 비닐을 뜯을 때도, 우유에 빨대를 꽂을 때도 아이는 모든 과정을 꼭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내려 한다. 나도 모르게 별생각 없이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꺼내어 줬다가는 그 즉시 "ㅇㅇ이가 할 거야!"를 외치며 뜯어진 비닐 안에 알맹이를 굳이 넣었다 다시 꺼내는 수고로움을 감행한다. 덕분에(?) 일상이 수시로 리부트 된다.

 우유에 빨대를 꽂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닐을 제거한 뒤 빨대를 꽂아주면 대번에 발부터 대차게 동동 구른다. 규모 1.6 정도의 지진이 삽시간에 다녀간 느낌이다. 제 몫의 일을 엄마에게 뺏긴 설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불운하게도 이 거센 발버둥의 배경이 공공장소이거나 설상가상으로 목청껏 샤우팅마저 동반한다면, 그야말로 마스크를 최대한 눈까지 끌어올려 세상을 잠시 소등하고 싶은 심정이다.




 결정적으로 육아 지옥의 방점을 찍은 날은 다름 아닌 어제였다. 연휴 끝이었고, 친정아빠의 생신 하루 전이기도 한 날, 느끼한 명절 음식과 피로한 기분을 떨칠 겸 가족들과 친정에서 한 시간 가량 거리에 있는 출렁다리에 가기로 했다.


 그곳엔 폭포수 절경도 있다 하니 출렁다리를 건너 산행을 마치면 눈여겨봐 둔 통창 뷰의 카페에 앉아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감상하며 카페인 충전을 할 생각에 내심 부풀어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출렁다리까지는 왕복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코스로 이어져있었다. 일행들은 일렬로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나와 남편은 아이의 보폭을 고려해 가장 뒤늦은 행렬에 합류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서서히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는데 고개를 돌려 본 아이의 입이 전방 5센티 정도는 튀어나와 있는 게 아닌가. 단순히 날이 더워서인 줄로만 알았다. 그때 갑자기 아이가 가던 길을 멈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순간 일상의 필름이 머릿속을 광속으로 스쳤다. 미운 세 살의 "다 내가 할 거야!" 소동을 철저히 간과한 것이다.


 아이는 별안간 내 손을 거세게 뿌리치더니 겨우 올랐던 계단들을 쪼르르 내려와 처음부터 다시 디딛기를 반복했다. 나와 남편이 도움닫기가 된 계단 오르기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손을 잡아주면 바닥에 드러눕기를 시전하는 통에 나는 행인이라도 연기해 보이고 싶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어지러워 겨우 고개를 쳐들고 눈대중으로 계단의 수를 세었다. 언뜻 봐도 아파트 10층 이상의 계단 수를 능가해 보였다.

출렁다리로 향하는 이 사서 고행길이, 내게는 만리장성 보다도 아득하고 아찔했다. 등에는 이미 땀이 흥건했고, 하행길의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마다 염려와 걱정이 배어있어 몸도 마음도 폭염의 한가운데를 아슬아슬 걷는 지경이었다.


 결국 우리는 흔한 풍경 사진 하나 찍지 못하고 계단만 오르내리다 허무하게 여행지에서 돌아왔다. 처연한 심경으로 방구석 랜선 여행을 통해 다시 찾은 그곳은 구석구석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 굽이 숨은 그야말로 뷰 맛집이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던 어제의 고행길 앞에서 마치 생에 처음 길을 잃은 기분으로 휘청거렸다. 이윤주 작가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서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슬픔을 '본다'고 말했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는 구절이 유독 사무쳤다.


 내게서, 그리고 네게서 이 시절이 더 큰 소란 없이 지나가기를, 내일 아침 눈뜨면 사라질 만큼 희미해질 어느 한 구간을 지나는 몸부림이기를 간곡히 바란다. 이 해프닝으로부터 거리 두고 싶어 기록하는 밤의 절규가 웃프게도 고달프다.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너의 일부는 내가 감싸 안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휴일의 끝자락에서 모든 영업일(특히 어린이집이 그렇다)의 재개를 기다리는 엄마의 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뱉는다. 곧 내일이 밝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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