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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May 28. 2023

공감 결여의 사회

노크없는 토크에 관하여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각종 사회적 이슈들이 넘쳐난다. 이념이 대립하고 내가 겪지 못한 상황에 냉소적이며 겉으로는 단념한 듯 치부하지만 속앓이 하며 타자와 나 사이에서 매번 줄타기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반면 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완전히 배척하지 못하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간헐적 사이다를 날리는 것으로 안분지족의 경지에 오를 리 만무하니 적소에 마땅한 언어필살기라도 하나쯤 방패 삼아 가지면 어떨까.




 서로 다른 이해관계는 가급적 피하고 싶어도 일상에서 생각보다 빈번히 마주하게 된다. 합의점은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의견이 충돌하다 보면 차리리 관계를 끊어내는 게 합리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손절이란 게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한 답은 아니다.

 각자 살아온 생활양식이 다르고, 노출된 매일의 일상이 다르고, 자주 보는 사람들이 다르다. 자신이 지향하는 준거집단이 실제 소속집단과 달라 난처한 순간도 더러 있다.


 그 안에서도 내가 경험한 내 픽이 모두의 원픽으로 채택되어야 하고 이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고압적인 불통러들이 종종 존재감을 떨친다. 깊고 좁은 한 우물 외길을 걷는 이들이야말로, 알고 보면 누구보다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자신을 향해 심리적 공감과 응원을 보내줄 대상을 절실히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공감할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지 않은가. 나약한 고독을 무기로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들은 타자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욕구를 이와 비슷한 상황을 통해 유사하게 발현하기도 한다.




 지난날 공감받지 못한 자신의 슬프고 처량한 처지는 영구 박제하는 대신, 타인의 근심이나 고통쯤은 별 것 아님으로 여기는 태도. 그리고 마치 스스로만 아는 통쾌하고도 미숙한 앙갚음을 재현이라도 하듯 '그때 너도 날 이해 못했지? 나라고 너를 이해하겠니' 와 같은 기저 심리가 자리한 이들. 말간 얼굴 뒤로 해명과 남탓에 열일하는 피해자 코스프레형이다.


 자신의 공감라이팅에 응하지 않은 상대에게 최소 서운해하진 말 것을 본인 스스로는 인지해야 한다. 남을 헤아릴 줄 아는 아량은 없고 오직 자기 연민에 사로 잡혀 있는 부류 앞에서 가끔 내 남은 인류애의 한 귀퉁이를 맥없이 소실하고 만다.


 무해한 다수의 공감이라는 키워드에 방어하는 입장을 취했으면, 제발 한 길만 뚝심 있게 가길 바란다. 삶은 결국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며 누군가는 뜻을 취하고 또 누군가는 감내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독주 또한 없다.

 내 뜻을 취하려거든 오만한 자세부터 내려놓는 습관이 필요하다. 분명 혼자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어우러져야 순조로운 영역이 있다.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독식과 과몰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유로운 마음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 휴일이면 되도록 자연을 벗 삼거나, 가까운 이들과 헐렁한 스몰토크를 꾸리는 것도 일견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 Unsplash@Volodymyr Hryshchen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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