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퍼스트 시즌6 성장과 확장의 에세이 9회 차(마지막) 참가후기
이제 꽤 쓰는 것 같다! vs. 왜 이렇게 못 쓸까?
더닝크루거 효과는 '우매함의 봉우리'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은 잘 모를 때 아주 우쭐대며 세상 다 아는 것처럼 굴다가, 조금 더 알아가면서 절망의 계곡에 빠진다.하지만 계속 배우고 경험하며 서서히 지식의 경지에 오른다. 이런 현상을 표로 그려낸 것이 더닝크루거 효과다.
글쓰기 수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오 나 좀 쓰는 듯?'하고 생각했다. 좋은 에세이의 구성요소도 배우고, 배울만한 글을 만나고 나니까 '음? 쓰는 거 너무 어려운데?' 싶었다. 그야말로 더닝크루거 효과의 현실판이다. 우매함의 봉우리에서 가장 괴로운 구간은 아마도 절망의 계곡이 아닐까. 하지만 꾸준함은 절망을 넘어설 힘을 준다. 글쓰기에서도 중요한 건 계속하는 마음이겠다. 계속 쓰는 것. 이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아트퍼스트 수업은 나에게 2가지 선물을 줬다. 글을 쓰는 습관과 글을 좋아하는 동지들! 계속 쓰다 보면 더닝크루거 효과의 그래프처럼 어딘가에 다다를 수 있겠지, 싶다. 함께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더없이 든든하다.
아트퍼스트 수업이 끝나도 후속 모임이 있다. 1달, 혹은 격주 간격으로 만나 글을 쓰고, 공개할 수 있는 환경(좋은생각 기고, 브런치 업로드, 백일장 참가)에 모임을 노출시켜보려고 한다. 끝맺음과 동시에 증발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켜줄 울타리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이 든든하다. 그만두고 싶을 때 서로에게 느슨하게 의지하면서 모임을 이어가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마지막 시간의 키워드는 퇴고! 지금까지 썼던 2편의 글 중 한 편을 퇴고한다. 건물을 증축하는 것과 같다. 토대를 남기고 계속 쌓아 올려 가는 과정이다. 작가가 프로냐, 아마추어냐, 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갈린다. 프로작가는 계속 고치는 사람이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계속하다 보면 최소한의 기준이 생기게 된다. 편차가 작아지게 된다. 꾸준하게 고치는 작가는 글의 편차를 계속 줄여나갈 수 있다. 그러면서 프로가 된다.
정문정 선생님이 가져오신 에세이, 김보통 작가의 <바나나 맛도 모르면서>를 함께 읽어봤다. 글에는 아무리 세상을 둘러봐도 바나나가 가장 맛 좋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너 진짜 다양한 과일 먹어보고 바나나가 짱이라고 하는 거야?' 묻는 사람들에게, '제가 다 먹어봤는데 진짜 바나나가 짱이거든요!'라고 외치는 글이었다. 정문정 선생님은 이 글이 퇴고할 때의 마음가짐과 닮았다고 했다.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 '여기 고치면 좋겠어요'라던가 '다른 글은 읽어봤어요? 이게 최고 맞아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럴 땐 들어나 보자. 하지만 내 생각을 믿기도 하자. 다른 이의 코멘트를 듣고, 수용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메시지를 잃지 말자. 내 안에 있는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자. 퇴고의 과정과 닮아있는 글이라며, 선생님은 마지막 시간 참고 에세이로 이 글을 가져왔다.
본격적으로 각자 어딜 고쳤는지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거의 다른 글이라고 느낄 만큼 수정한 사람, 분량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사람, 에피소드를 재배치한 사람 등등. 퇴고의 형태는 다양했다. 하지만 그래도 원래의 형태가 다 보였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허물 수 없듯, 원글도 완전히 허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고치면서 더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왜 이 글을 쓰게 된 것인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오래 진심을 우려낸 글에는 목소리가 담긴다. 그런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듣게 되고, 잔잔하게 감동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퇴고를 통해 구성원들이 남겼던 각자의 이야기에 대한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9차례나 모임을 이어가는 동안, 재직하다가 휴직하다가 이직을 했다. 상황이 우연히 겹쳤다. 그런데 정말 우연일까? '뭘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질문은 '뭘 쓰고 싶은 걸까'와 닮았다. '왜 이 일을 하고 싶은 걸까'는 '왜 이 글을 쓰고 싶은 걸까'와 닮았다. 진심을 향한 질문은 글쓰기에도, 직업에도 적용되었다. 수많은 기회 속에서 선택할 일을 얼마나 자주 마주할까. 결정하기 전 숙고할 수 있는 한 겹의 층이 생겼다. 나의 진심을 들여다보기. 글쓰기 모임이 좋은 이직처를 물어다 줬다고 하기엔 비약이 있다. 하지만 이직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에 결정적으로 '나'를 들여다보게 해 준 것은 맞다.
나를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간 쌓아 올린 모양새를 더듬어 살펴보고 이어 짓는 건 할 수 있는 일이다.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나. 이제 막 서른을 코앞에 두었을 뿐인데. 짓던 시간만큼, 앞으로 더 지어갈 수 있으니 계속 써야겠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