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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승 Sep 12. 2021

93세 노모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딱 7년만  더 살고 헤어지자

 노모가 혹독한 병환에서 이겨내시고, 6개월 만에 걸음마를 시작하셨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한발짝 한발짝 내딛는 발걸음에 그분들은 박수치며 얼마나 행복해 하셨을까? 하는 느낌이 어떤지 실감하게 되었다.


 노모는 지난 1월 중순 새벽녘 잠결에 일어나 화장실로 이동하시다 중심이 흐트러져 넘어지시면서 고관절 골절로 쓰러지시고. 꼼짝도 못한 상태에서 119구급차로 대학병원 음급실에 도착 하자마자 긴급히 수술을 받았다. 예견했던데로 노인들이 주로 낙상을 하여 다치게 되는 고관절 골절. 주변에 지인들 부모들이 쉽게 다치는 병이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자식된 내가 직접 당해보니 황망하기 그지 없었다.

제반 검사와 수술전 대비를 하고 입원하신지 하루가 지난 익일 오전 8시반 수술이 시작 되었다. 수술실로 들어가신지 건 5시간의 대수술. 회복실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거의 12시간이 지난 후에나 어머님 얼굴을 대할 수 있었다. 90이 훌쩍 넘은 노쇠한 몸으로 그  긴 시간  버티어 내신 것 만도 기적이었다.


  안도감도 잠시였다. 수술이 끝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이었고 생존과의 싸움이었다. 대부분의 노령환자들이 겪는 섬망증세(일종의 환각 증세)로 두손 두발이 묶이어 반 감금된 노모의 얼굴을 보며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모른다. 수술이 끝나고 3일이 지나서야 그나마 눈을 떠셨지만 제대로 사람들을 알아보시질 못하고. 거의 일주일 내내 잠에만 취해 계셨다. 물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치매증세까지 함께 오면서 가족들도 제대로 알아보시질 못하고 일정기간의 기억도 사라지셨다.

수술이 끝나고 보름이 지난 후에서야 그나마 미음정도 드시고. 중한 환자들에게 투약하는 영양 보충 링거로 연명해가셨다. 가족들도 이제 어머님과의 이 생애 연을 끊는 과정이리라 생각하며 마음준비까지 매일매일 다짐하며 마음 달래기도 하였다.


  다행히 한달이 지나면서 몸을 움직이고 간단한 재활을 시작했지만 회복은 한없이 더디기만 했고. 간병하는 자식들은 지쳐 감당을 해내기가 몹시 어려운 지경이었지만 조금씩 차도를 보여 대학병원에서 하급병원으로 전원을 요청받아 재활. 물리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치료사 간병인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고 기본 걸음걸이 운동을 시작하자 말자 또다른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제 좀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새로운 병을 확인하면서 절망감이 몇배로 커져버렸다.


 초음파 CT검사를 통해 대장암징후가 발견되었고 . 가족들은 또다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 했다. 대장내시경과 조직검사를  통해 확인된 대장암2기.

청천벽력.  두달 전 대수술을 받고 또 다시 수술대에 모셔야 할지 . 그대로 묻어두고 생명의 끝자락까지 가야할지. 선택은 환자가 하는게 아님을 이번에 깨달았다. 형제들 모두 한번더 기적을 바라자. 그리고 설사 수술 중 세상과 하직을 하시더래도 고통 없는 남은 생을 살게 하자라고 우리들은 마음을 모았다. 대장 15센티를 절개하는 대수술 . 노모는 또 이겨내셨다. 93세의 나이에 연이은 대수술. 이전 수술 후에 겪은 섬망증세는 더 심해지고 회복은 한정없이 더디어 졌지만 노모의 회복력은 강인했다. 하지만 병상에서 일어나 걷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건강하게 좀더 많은 날을 살아 계셔만 주기를 바랄뿐. 우리의 바램은 소박해져갔다.  


 무한정 큰 병원에서 지낼 수가 없는 규정으로 우리의 선택지는 두 곳이었다. 집과 요양병원. 병원 주치의는 노모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고 느닷없는 위급사항에 신속히 대처해야 하니 재활전문 요양병원으로 추천, 권고해주셨지만 우리는 노모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신 집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진동침대와 휠체어를 구입하고 제반의 준비를 해두고, 건 넉달만에 노모가 숨쉬고 살아온 그리운 집으로 돌아 오시게 되었다. 그토록 아끼고 구석구석 빗질, 걸레질 하신 당신의 집인 줄도 모르는 상태로 새로운 투병생활을 시작하셨다. "여기가 어디고?" 라는 묻는 질문이 사라지고. "여기가 우리 집이네" 라고 웃음 짓는 모습은 집으로  돌아오신지 건 한달이 지나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누워지내는 침대 생활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집이라는 안정감에 하루하루 정신도 제법 맑아지시고 있었다. 물론 물리치료사가 직접 방문해서 격일로 재활도 하고 운동을 쉬지않고 하고. 큰형님은 물리치료사가 빠지는 날은 재활운동을 도맡아 하면서 차도가 나날이 달라지게 되었다.


 여름 더위가 시작될 무렵 7월에는 휠체어를 타고 거실을 돌기도 하였다. 보조기를 잡고 걸음을 걷기 시작 했다. 우리는 기적을 보게 되었다. 쓰러지신 후  이제 본인 스스로 아무런 부축도 없이 독자적인 걸음마가 시작되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런 기적을 우리는 매일 매일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올 초 첫 수술 후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리 오래살지 못하신다고. 우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슬픈 날들. 이제 반전이 되어 노모는 건강을 되찾고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 다시 돌아오고 있다. 93세 노모의 의지와 가족들이 함께 한 불굴의 정신 어쩌면 내가 이 나이에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것과 결코 다를 바가 없는듯 하다.


 지난번 노모의 손을 잡고 그리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였다. 이제 더 아프지 말고 딱 7년만 더 건강하게 살고 헤어지자고. 그것은 바램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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