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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시나비 Feb 10. 2020

몬트리올의 겨울, 낭만적 ep.1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뒤늦은 어학연수

몬트리올에 온 지 딱 일주일이 지났다.

어떻게든 끄적여 놓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거니 싶어 브런치에 둥지를 틀었다.


몬트리올은 생각보다 더 여유롭고 낭만적인 도시다. 툭 치면 화를 쏟아낼 것 같은 서울 사람들에 비하면 몬트리올 사람들은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듯 순둥순둥 하다. 붐비는 아침 출근길에도 찡그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싱글거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짜증스러운 얼굴은 아니다.


일주일 동안 일어난 굵직한 일들을 대략 적어보자.


퀘백 한인 입양가족 설날 모임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한인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언니랑 급 친해지는 바람에 쭐래쭐래 따라나섰다. 여기 교민신문인 한카타임즈의 편집장인 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하고 자원활동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중 일 년에 한 번 여는 한인 입양가족 모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대략 50 가정이 모인 데다 한국인 자원활동가, 그 가족까지 얼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나와 주인장 언니는 한복체험 코너를 맡았다. 아동/어른, 남/여로 한복을 분류해 건 후에 한 손으로 들기에 살짝 묵직한 스팀다리미로 시종일관 다렸다. 줄잡아 20~30벌을 다리고 나니 팔이 뻐근했다.


입양한 한국인 아이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퀘백 가족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아이에게 자기 나라 문화와 음식을 알려주려는 마음이 귀하게 느껴졌다. 개 중에는 자기가 낳은 아이와 입양한 아이들 한 팔에 하나씩 나란히 안은 엄마도 보였다. 피부색이 완전히 다른 형제지만 꽤나 친해 보였다. 나 같이 밝고 천진한 미소를 띠고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괜히 안심이 되고 뭉클했다.


날개옷을 꺼내 입다.

1992년,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다. 비 외고 출신으로 불문과에 들어가 보니 외고 출신들이 훨훨 날아다니는지라 맘고생을 좀 했다. 나름대로 죽어라 노력해도 그 애들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해 좌절한 밤이 얼마던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프랑스 선생님이랑 자유롭게 이야기한 아이들과, 프랑스 사람이라고는 대학 와서 처음 만난 나 사이에는 넓은 강이 흘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2년을 꼬박 애쓴 결과, 그네들을 근소한 차이로 앞질러 이름도 찬란한 '성적 우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더랬다. 성적 장학금으로 효도한 건  그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교수님께 구박을 당하면서 연습한 덕에 발음도 썩 괜찮아진 채로 학부를 1996년에 졸업했다.


연이어 들어간 불문과 대학원. 남들은 서너 개씩 대기업에 합격해 골라가는 마당에 나는 왜 때문에  굳이 대학원을 고집했던가. 석사, 박사를 후딱 20대에 마치고 30대 초반에 교수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던 때였으니까.  허황한 꿈이 산산이 공중에 부서지는 데 딱 4년이 반이 걸렸다. 2000년 8월에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 석사 졸업식에도 가기 전에 석사 가운을 빌려 입고 자체 졸업식을 한 후에, 며칠이 지나지 않아 큰 아이가 태어났다. '이걸로 내 인생에 공부는 끝이구나' 싶었다. 핑계 김에 그냥 다 접고 싶었던 거였다.


7년이 무색하게 흐른 후에, 어이없게도 아프리카 콩고 여성들이 잠자는 불어 감성을 깨워 주었다. 정치 난민으로 한국에 온 콩고 엄마 네 명에게 불어로 한글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내 불어가 늘었다. 책으로만 읽고 쓰던 불어가 그제야 몸을 입고 현현했다고나 할까. 콩고식 불어는 발음과 억양, 때로 어휘까지 달라 당황스러웠으나 문장력으로만 따지면 미야나 미쇼의 불어는 넘사벽이었다.


재밌게도 콩고 여성들과 친해지면서 점점 한국어로 말할 일이 많아졌고, 그중 미야가 일취월장 한글 실력을 키우자 더 이상 불어를 쓸 일이 없어졌다. 같이 일하는 스텝들의 단톡 방마저도 한글 일색이 되어 버렸으니 불어는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20년 전에 못 간 불어 연수를 이제서야 몬트리올로 온 거라고 해야겠다.  실은 1997년 1월에 프랑스로 언어 연수를 가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자취방을 빼고 지인의 집에 머물며 대기 탔었더랬다. 그때 오빠(지금의 남편)의 꼬임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중에 유학 가면 되지, 뭣 하러 아깝게 어학연수를 가?"


아마 오빠는 직감했었나 보다. 내가 어학연수 가서 유학으로 접어들어 빠리에 엉덩이 붙이고 안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언이 적중이라도 하듯. 나는 한국에 주저앉았고  그다음 해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날개옷을 벽장 깊숙이 박혀 버린 것이었다.  


공들여 첫 아이 낳고 생각 없이 둘째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20년이 훌쩍 지났다. 어느덧 큰 아이는 스물한 살, 작은 아이는 열여덟에 접어들었다. 작년에 딸은 영화 의상 전문가의 꿈을 이루고자 실기 중심의 패션디자인대학에 합격했고, 아들은 '더불어 사는 평민'을 모토로 내세우는 학교에 진학했다. 홍성에 있는터라 많아야 한 달에 많아야 두 번 집에 오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명실상부, 진정한 자유부인의 반열에 오른 마당에 벽장 깊숙이 박아둔 날개옷을 꺼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날개옷을 입고 처음으로 날아온 곳이 몬트리올이다. 프랑스가 아니라 왜 몬트리올이냐 하면, 여기는 불어와 영어를 일상적으로 두루 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주정책이 나름 성공한 곳이고, 사회적 경제의 메카라 불리는 곳이니 앞으로 박사과정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 아닌가.


불어 수업 시작

2월 3일인 지난 월요일,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어학원에 들어갔다. 오리엔테이션을 받겠다고 모인 대부분의 학생이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동양인이니까 좀 어리게 보겠지' 최면을 걸어봐도 머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다닥 레벨테스트를 한 결과, 나더러 Niveau 5라고 했다. 전체 9단계 중에 다섯 번째 단계라는 말이었다. '나쁘지 않은 걸' 자축하며 불어 강의를 듣는 Aldred 건물로 넘어갔다. 아뿔싸, 그날따라 웬일로 Niveau7 선생님이 감기로 결근한 터라 첫 시간은 두 반이 같이 수업을 듣고야 말았다. 확실히 7단계 학생들은 수준이 높았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반과거, 복합 과거 등등을 그네들은 거침없이 내뱉으며 설명까지 불어로 덧붙이는 게 아닌가.   


다행히 두 번째 시간은 Niveau5 끼리 수업을 진행했다. 우리 반 선생님의 이름은 Hugo. 빅토르 위고의 그 위고다. 유명한 남자 화장품 브랜드이기도 하고. 위고 선생은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아무리 후하게 쳐도 삽 십 대 초반을 넘지는 않아 보였다. 까마득한 동생이지만 선생님이니까 처음에는 좀 어렵게 느껴졌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위고가 까불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혼자 신나서 떠드느라 콧소리를 컹컹대기 바빴다. 어찌나 말을 빨리 하는지 대충이라도 알아듣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Niveau5부터는 프랑세(프랑스 불어)가 아니라 퀘베꾸아(퀘벡식 불어)로 수업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위고는 퀘베꾸아를 거침없이 시전해 보였다.  어차피 여기서 오래 공부할 생각을 하면 퀘베꾸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피식 웃음이 났다. 발음도 억양도, 심지어 어휘도 약간 달라서 당황스러웠으나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에효, 세 시간 동안 두뇌를 RPM 최대치로 돌리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어학원 1층 카페에서 뜨끈한 수프와 빵으로 요기한 후 차가운 몬트리올의 겨울바람에 열 받은 머리를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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