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 시티 영화관 정중앙에서 폭풍 오열한 썰
그 누구보다 뜨거운 설을 호주에서 보내던 중, 어느 날은 엄마랑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왔다고 했다. 역사를 다룬 작품은 늘 관심 가지는 엄마이고 나는 그 관심과 열정이 엄마만큼 뜨겁지 않은, 미적지근한 관심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 영화도 엄마의 감상을 들어보기만 하려고 했다. 정말 듣기만 하려고, 그런데 어느 순간 영화를 직접 보러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알고 보니 호주에도 거의 동시 상영을 시작하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영화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움직인 어떤 포인트는 단 하나, 유배를 떠난 단종을 마지막까지 모셨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늘 주인공의 서사보다 그 주변사람, 변두리의 이야기를 궁금해 해 왔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하기보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 단종의 역사를 알고 있던 나는 영화의 그 끝이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기도 했고, 내가 얼마나 영화를 감정에 몰입해서 보는지 아는 엄마는 나에게 꼭 손수건과 휴지를 넉넉하게 챙겨가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바지 한쪽 주머니에는 손수건을, 한쪽 주머니에는 양껏 챙긴 두루마리 휴지를 단단하게 챙기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 글에서 내가 얼마나 이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으나 혹여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이야기 줄거리를 많이 밝힐 수도 있으니 미리 알기를 선호하지 않는 분들은 여기까지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며 다음에 또 다른 이야기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로 작별을 말하고 싶다.
시작부터 강렬했다. 생각보다 고문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괜히 내 몸을 끌어안고 보게 되더라. 이렇게 계속 무겁게 이야기가 흘러가려나 싶을 때 엄흥도, 유해진이 나타났다. 이렇게 폭소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배를 부여잡았던 포인트가 영화 초반에 등장한다. 엄흥도가 호랑이에 쫓기다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때,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사람들에게 발견된 자세가 마치 요령을 피우려고 몰래 어디 숨어서 낮잠을 청하는 자세와 너무 닮아있어 같이 사냥을 나온 마을 사람들과 아들 태산의 오해를 산 상황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그려냈을까, 작가와 연출의 재치 있는 생각 덕분에 극 초반부터 확 긴장되었던 정서를 이완시킬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씁쓸하고, 짜고, 맵고, 달달한 마치 오미자의 맛 같은 장면들의 향연이었고, 내내 몰입했다. 신기했던 건, 어느 순간부터 사람 이홍위를 정말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던 나의 마음이었다. 나를 지켜주던, 내 편이었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 끔찍한 죽음을 맞고, 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홍위가 유배지에서 마을사람들과 어떤 사건을 겪고 나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기뻤고, 내가 먹은 밥은 어디서 왔는지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기특했다.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모습에 흐뭇했고, 매일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밥을 꼭 나눠 먹는 모습에서 정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조금씩 새어 나오는 눈물은 홍위가 내뱉은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한 삶을 아느냐?". 내 의지대로 사는 삶, 사실은 나도 정말 어느 것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고, 그래서 현재 호주에서 내 의지대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과정을 기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어린 이홍위가 사는 동안, 그리고 그 삶의 마지막까지 어찌 보면 모두 타인에 의해 정해져 있는데도, 본인은 하루하루를 자신의 빛깔대로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자꾸 눈물이 나왔고, 결국 나를 보살펴준 마을 사람들이 다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그 방문을 뛰쳐나왔지만 결국 한명회에 의해 발목이 붙잡힐 때에도, 그의 의지대로 하려는 일에서 번번이 낙담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너무 잘 알기에 너무 통탄스러웠다. 그래서 자꾸만 영화를 보는 내내 왕족이 아닌 인간 이홍위의 삶은 어땠을까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쓰럽고, 처절하고, 위태롭고, 미어지도록 괴로운 그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 것 같았다.
슬픈 결말이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 일이었구나를 절감하면서, 금성대군이 사약을 마시는 그 순간부터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홍위도 이제 사약을 마시겠구나 그 별이 이렇게 짧게 빛났다가 사라지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가슴이 미어질 듯 울기 시작했던 건 결국 홍위가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에 자신의 죽음, 그 방법이 있었다는 게 너무, 너무 사무치도록 슬펐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내 안에 겹겹이 쌓여있던 감정이 홍위의 죽음 앞에서 모두 폭발해 무너져 내렸다.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홍위를 직접 죽여야했던 흥도의 마음도 헤아려보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는 동안 계속해서 울고 또 울었다. 감정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영화관 내 모든 관객들이 떠나가고 혼자 앉아서 계속 멍하니 대한민국 영월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영화관을 청소하러 들어온 사람에 의해 호주 브리즈번으로 돌아왔다.
올해 한국에 돌아가면 영월을 한 번 가봐야겠다. 가서 홍위를 안아주고 싶다. 지금 지내고 있는 그 곳에서는 마음껏 물장구를 치며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