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어야 할 야경 스팟이 대략 네 군데쯤 돼요. 하루에 두 군데씩 이틀 찍을까요?" 우리의 밤은 길고 야경을 찍을 수 있는 시간도 여유롭다 생각했다. 그런데 사진작가님은 고민도 없이 "그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하루에 한 군데도 겨우 찍는 게 야경 사진이라면서. "으음? 왜요? 해가 지고 나면 깜깜한 시간이 꽤 긴데요...."
그랬더니 사진작가님이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척 보여준다. "이런 사진들을 원하시는 거잖아요. 이런 사진을 찍는 건 해 지는 시간 전후 30분 정도만 가능해요. 그것도 그날 날씨가 도와줘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시간이 됐는데 하늘이 제대로 안 나오면 다른 날 다시 찍어야 할 수도 있어요."
그 사진들을 보다가 깨달았다. 우리가 야경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검은 도화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남산 타워에 올라 깜깜한 밤을 내려다보며 점점이 박힌 불빛들에 감탄한 건, 실제 모습 이어서다. 그걸 사진으로 찍으면 검은 도화지에 점 몇 개 찍은 정도로 보이겠지. 과연 그게 우리가 원하는 야경 사진일까?
우리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야경 사진들에는, 실루엣이 있다. 어렴풋하게라도 무언가의 형체가 보이고 그 뒤로 어두운 하늘이 보이는 풍경. 그러니까 야경사진에는 빛이 필요하다. 눈앞의 물체의 실루엣만이라도 남겨서 사진 속에 드러나게 해 줄 빛. 야경은 그저 어두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몰랐다. 야경 사진에 빛이 필수라는 사실을.
야경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해 지는 시간 전후 30분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우리가 원하는 야경 사진, 특히 하늘이 나오는 야경 사진의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예쁘게 지는 노을이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점. 우리가 야경 사진에서 기대하는 건 그저 까만 도화지가 아니라 아름답게 물든 어두운 배경이다. 어둡지만 예뻐야 한다. 핑크빛, 주황빛, 푸른빛이 어두우면서 밝게 어우러지는 배경이 야경 사진의 필수인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해 질 녘에만 볼 수 있다.
우리가 얘기하는 야경 사진이란, 실은 해 질 녘 사진이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 우리는 매거진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고, 첫 호는 '서울'을 주제로 했다. 여행을 말하는 매거진인지라 마지막에는 서울의 밤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의 밤을 보여주기에 좋은 곳은 어디일까. 여기저기 리서치를 많이도 했다. 지면의 제한이 있어 그걸 추리고 추려 마지막에 남은 후보지 중 하나가 한강이었다. 부산이 고향인 나에게는 더더욱 서울의 상징 같았던 한강. 한강과 남산타워를 한눈에 담는 게 그날의 목표였다.
사진작가님과 4시쯤 만나 장소 물색부터 시작했다. 참고하려고 찾아둔 사진들을 보면서 스팟 몇 곳을 돌아봤다. 어디가 가장 좋을까 고민하다 보니 마지막 후보지로 두 개가 남았다. "이쪽이 동쪽, 이쪽이 서쪽이에요. 이 스팟은 서쪽을 찍게 되기 때문에 노을이 확실히 잘 나올 거예요." 둘 중 하나는 방향상 서쪽 하늘을 찍게 되고, 하나는 동쪽 하늘을 찍게 되는 스팟. 서쪽 하늘을 찍을 수 있는 스팟은 여러모로 완벽했는데, 동시에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매거진에서도 이미 많이 실었던 장면이라는 것.
"동쪽 하늘은 노을이 전혀 안 보일까요?" 야경을 볼 때 딱히 방향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서쪽 하늘이 예쁘게 물들었고 가장 예쁘게 물든 하늘만 바라봤지, 반대쪽이 어떤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같은 하늘인데, 동쪽에는 노을이 전혀 번지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날이 좋은 날은 동쪽으로도 빛이 반사되면서 핑크빛이 번지기도 해요. 경험 상 오늘은 노을이 예쁘게 잘 질 것 같은 날이에요. 이런 날은 동쪽으로도 노을이 번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장담할 수는 없어요. 서쪽은 100%지만 동쪽은 모험이라고 보셔야 해요."
결정은 담당 에디터인 내가 해야 하는 것. 프로의 세계에서 야경이란 해가 지기 전에 미리 모든 장비를 세팅한 후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딱 그 한 스팟만 찍는 것이었다. 그러니 노을 질 무렵에 "안 되겠어요. 이쪽 방향으로 바꾸죠."라고 할 수도 없는 일. 해가 지기 전에 노을이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해야 하는 결정. "이쪽으로 하시죠." 나는 동쪽 방향으로 찍어야 하는 스팟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동쪽 방향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찍지 않는 뷰. 사진작가님 말대로 운 좋게도 오늘 노을이 동쪽까지 번져주기만 한다면 더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두 번째는 사실 나는 노을 말고 짙은 네이비로 물든 야경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방향은 잠수교가 보이는 위치. 위아래 두 개의 다리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궤적이 짙은 네이비와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스턉"을 외치고 싶어졌다. 아니, 스탑으로 될 일이 아니지. "30분 전으로"를 외치고 싶었다. 그날은 노을이 말 그대로 환상적이 날이었고, 우리는 환상적인 서쪽 하늘 대신 동쪽 하늘을 찍고 있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의미 없는 줄 알면서도 사진작가님한테 물었다. "저기, 우리 지금 이쪽으로 카메라 돌릴 수 없나요?" 혹시 돌릴 수 있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긴 했다. 그 스팟의 서쪽에는 의미 있는 피사체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의미가 있으려면 거기로부터 100m 이상은 오른쪽으로 옮겨 새로 세팅을 해야 했겠지.
아무리 동쪽 뷰도 멋있다 해도 서쪽 하늘의 노을을 이길 수 없었다. 왜 과거의 나는 노을 지는 하늘만 바라봤던가. 한 번이라도 반대쪽을 바라봤다면. 그쪽 하늘에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알았다면. 분명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역시 낮은 확률은 낮은 그대로였고, 그날의 동쪽 하늘에는 핑크빛이 전혀 번져오지 않았다.
그날의 동쪽과 서쪽 하늘. 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동쪽이나 서쪽이나 그리 멋지지는 않다. 게다가 그날 정신이 너무 없어 스케치를 위해 대충 찍은 사진이 전부라 더더욱...
그날의 사진은 나름대로 멋있었다. 짙은 네이비에 번지는 주황빛 불빛. 차량의 헤드라이트 궤적이 꽤 멋있었다. 한강과 다리와, 서울의 상징 같은 아파트와 남산타워가 한 번에 잡힌 멋진 사진이었지만, 우리는 그 사진을 결국 쓰지 못했다. 다른 날 찍은 서쪽 하늘의 노을이 훨씬 더 멋있었으니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여전히 노을 지는 하늘만큼이나 네이비 배경에 강렬한 불빛들이 그대로도 좋았다. 하지만, 그래, 노을 지는 하늘보다는 조금 덜 좋다.
"나 한동안은 동쪽 하늘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그날 촬영을 마치고 나오며, 전화로 친구에게 말했다. "이건 명백한 내 잘못이야. 내 판단이 틀렸어. 미안해." 정말이지 한동안은 하늘을 보지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늘만 봐도, 해가 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장 카메라를 돌려 서쪽 하늘을 찍어줄 수 없는 프로의 세계도 원망스러웠다. 아니, 누가 뭐래도 이건 나의 명백한 판단 미스였다. 잘 모르면 안전한 선택을 했어야 했다. 게다가 이건 나 혼자의 일이 아니라 팀의 일이지 않은가.
멋진 야경 사진을 찍고 싶다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건 동쪽 하늘에 미련을 갖는 일이다. 아무리 동쪽에 더 좋은 피사체가 있더라도, 동쪽이 구도가 더 좋더라도, 멋진 야경 사진을 찍고 싶은 거라면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마시길. 야경을 찍을 때는 무조건 서쪽. 서쪽하늘만 바라보는 거다.
덧. 다행히 다음번 촬영에서 멋진 노을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 덕분에 나의 트라우마는 금방 사라졌다. 정말이지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요즘 나는 해 질 녘 한강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