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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Nov 24. 2022

원래 글 쓰는 일을 했었나요?

그날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이런 회색지대에 있는 엄마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회색지대. 그녀의 의도를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정확히 그 회색지대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석한 회색지대는 이랬다. 내 일에 대한 욕심으로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엄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아가 가장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는 엄마도 아닌. 아이들과의 시간이 소중한만큼 나도 중요하다면서, 정작 내 일은 풀타임으로 채워하지 않는 사람. 막상 일을 구할 때는 아이들과의 시간이 보장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필연적으로 제대로 된 일 기회는 고사해버리고 결국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며 딱히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만을 하고 있는 사람, 그게 나였고, 나는 여기가 회색지대라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던 날, 카페에서.


회색지대에서 내가 찾은 일이 글쓰기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일. 메뚜기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글을 쓰고 있었고, 그날의 인터뷰이였던 내게 인터뷰어인 그녀가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원래 그전에도 글 쓰는 일을 했었나요?" 아, 나는 내가 언제나 쓰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전에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적이 없다.


"그냥 저는 쓰는 일이 제 인생의 옵션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때는 글을 써야겠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었어요." 그랬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기 때문에 세상의 복잡 미묘함을 몰라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어린 시절 나는, 언젠가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글을 써야지, 책을 써야지 생각했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이 많은 아이였어요. 종종 제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무엇이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깨닫고 나니 혼자 진지하고 혼자 심각하고 혼자 우울한 이야기들을 모두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어린 시절, 나는 시를 썼다. 시작은 중학교 2학년. 교내 경시대회에서 시 부문 상을 받은 게 계기였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시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특히 힘든 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시로 풀었다. 시를 써야지 마음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때 나에게 시는 쓸 수밖에 없는 글이었고, 덕분에 마음이 복잡한 날들을 견딜 수 있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꿈은 아나운서가 되는 거였다. 경상도에 살면서 서울말을 쓰는 아이. 덕분에 자꾸 사회를 맡을 일이 생겼고, 내가 아나운서와 어울린다는 착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TV 속의 화려한 아나운서들을 보다가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될 텐데, 엄마가 되고 나면 일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아직 어렸는데, 왜 그런 걱정까지 당겨했는지 모르겠다. 이러니 이런 얘기를 친구들과 나누지 못했던 듯) 나름 심각했던 나는 이런 인생 계획을 짰다.


"일단 열심히 공부해서 아나운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해서 내 이름을 널리 알려야지. 그리고 서른 즈음엔 아이를 낳고, 만약 아이 때문에 일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면 육아에 몰두하다가 다시 여유가 생길 때쯤 글을 쓰자. 책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런데 책을 낸다고 사람들이 다 읽어주는 건 아니니까, 그때를 위해서 아나운서로 일하는 동안 정말 열심히 해두는 거야. 그때 알려둔 이름으로 내 책을 알리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계획이지만, 허무맹랑함 속에 현실감각 역시 담겨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을 그때의 나는 어찌 알았을까. 그때의 나는 미래의 나를 꿰뚫고 있었다. 아나운서라는 큰 꿈을 가지고도, 엄마가 되면 멈출 수도 있다 생각했다. 실제 미래의 나는 아나운서가 되지 못했지만, 엄마가 되고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 나로 서고 싶다 생각했을 때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쓰기 시작할 땐 기억하지 못했던 어린 나의 당찬 계획은, 그로부터 2년쯤 지나서 글을 쓰는 나를 정의하려고 시도하던 즈음에 떠올랐다. 뒤늦게 떠올리고는 '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구나.' 했다.


어째서 내게 글쓰기가 인생의 옵션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생각이 많아서였다. 어린 시절 시를 쓰면서 위로를 얻었고,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글을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건, 사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편해서였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고 그 생각들이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것들일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해서였다.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태생적으로 자꾸 Too much talker가 되지만, 사실 그러면서 늘 미안하다. 그런데 글은 좀 다르다. 어차피 내 글을 읽고 싶은 사람들이 읽을 거라고 생각하면, 마구 늘어놓는 것이 덜 부담스럽다. 읽는 이에게 '뒤로 가기'를 누를 자유가 있으니, 내 말들이 무례할 가능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쓰지 않은 날은 없지만, 본격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말할 수 있는 건 이제 3년 차. 그 시간 동안 내 쓰기의 장르도 다양해졌다. 쓰는 이유도 더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묻는다면 그건 그저 내가 Too much thinker이자 Too much talker여서. 조금 덜 무례한 방식으로 나의 말들을 쏟아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보면 다양한 글쓰기 플랫폼과 읽어주는 이들이 있어 늘 고맙다. 덕분에 위로가 필요한 날,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그저 풀어놓고 싶은 날, 툭 꺼내놓고 가벼워질 수 있다.


* 다음에는 글을 쓰는 덜 근원적인, 새로이 깨달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볼게요.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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