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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Oct 10. 2023

7살 아들의 부산여행로망

우리의 2박3일

부산이 친정이라는 말에는, 한국의 대표 관광 도시인 부산이 결코 관광지가 될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부산이 친정일 뿐 아니라 9살부터 18살까지 10년을 그곳에서 산 나에게 그곳은, 더욱이 삶의 터전일 수밖에 없었다. 추억이란 현재보다 짙어서, 어린 날에 대한 향수란 지금 이곳의 현실보다 진해서, 나는 늘 내가 부산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됐다. 부산에서 산 날이 10년, 서울로 올라와서 수도권에 머문 게 20년. 이제 나는 부산 사람보다는 여행자가 더 어울린다는 걸. 해운대를 걷다가 엘시티를 발견한 날이었다.


해운대에 엘시티라는 건물이 들어선다는 건 미디어를 통해 알았다. 완공되었다는 소식도 뉴스에서 봤던 것 같다. 해운대를 거닐다 높이 솟은 건물 앞에서 "오, 이게 엘시티네." 했던 그때의 목소리는 분명 여행자의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100층에 위치한 전망대 엑스 더 스카이에도 올랐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해운대는 처음이었다. 레이스처럼 흩어지는 파도가 참 아름다웠다.


그날 그 자리에, 나보다 훨씬 더 신이 나서 전망대를 둘러보는 작은 사람이 있었다. 나의 둘째 꿈이었다. 꿈이에게 엘시티는 그야말로 꿈의 건물이었다. 건축설계사가 되는 게 여러 개의 장래희망 중 하나인 아이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건 높은 건물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나 타워들을 검색하고 탐구하다가 다섯 번째로 높은 건물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던 아이다. (그 건물은 롯데월드타워) 그 아이가 엘시티를 유심히 살피다가 말한다. "이게 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네. 부산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아이가 시선을 준 곳은 1층 부동산이었다. 엘시티 조감도를 연구하듯 보다가 말했다. "엄마, 여기 호텔도 있고 레지던스도 있어. 나 여기 가보고 싶어." 부산이라면 늘 친정에서만 묵던 우리가 처음으로 달맞이고개 위 호텔에 방을 잡은 날이었다. 아이는, 다음에도 하루쯤은 할머니집 대신 호텔에 묵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게다.




그로부터 1년, 네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이번 여름은 둘째의 골절 수술 덕에 더 정신없이 지나간 터였다. 둘째를 위해서도, 수고한 나를 위해서도, 선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이 여행 갈까?" 그렇게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에 떠오른 것이 엘시티였다. 첫 계획은 둘만의 여행이었지만, 엘시티라면 둘만 가기는 아쉬우니 첫째도 함께 하기로 했다. 출근해야 하는 아빠만 두고 떠난 모자 여행. 여름의 끝에 우리는 엘시티 레지던스 90층에 도착했다.



7살 아들의 부산여행 로망. 그것은 엘시티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엘시티의 초고층이었고, 90층은 그의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열고 싱글거리며 아래를 바라본다. 거실을 살피고, 큰 방 작은 방 골고루 들락거린다. 모든 방에서 바다가 보인다고 외치며 같은 풍경을 보고 또 봤다. "봐, 어디서 보든 바다가 보이잖아. 다 바다뷰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바다뷰가 가지는 의미와 나의 바다뷰가 가지는 의미 사이의 차이를 느꼈다. 나에게 바다는 언제나 의미가 있다. 아래에서 보는 바다와 위에서 보는 바다, 10층에서 보는 바다와 90층에서 보는 바다는 조금 다르게 아름답지만 모두 그저 좋다. 그게 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지금 7살 아이에게 중요한 건 다른 바다가 아니라 90층이라는 초고층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다. 1년 넘게 꾸준히 어필해 온 그의 부산여행 로망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2박 3일 내내 이곳이 90층임을 강조하며 행복해하고 또 행복해했더랬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그것은 7살 아이의 로망이기도 했지만 나의 로망이기도 했다. 매번 아이의 유난스러운 고집에 끌려가듯 승낙했지만, 실은 내가 피우지 못하는 고집을 피워주는 아이가 고마웠다. 지척에 친정 집을 두고 굳이 엘시티 레지던스 90층에서 숙박하고 싶다고 말 못 하는 나의 "아이가 이렇게 원하잖아."라는 말 뒤엔 "사실 나도 그러고 싶고."라는 말이 숨어있었다. 바다는 어디에서 보든 다 아름답지만,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나는 90층의 바다가 궁금했다. 그건 전망대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완전히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루를 온전히 머무르면서 보는 뷰에는 24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날 새벽 6시. 우리 셋 모두 일어나 거실 창 앞에 붙어 앉았다. 일출 시간 6시 20분, 90층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태양은 매일 아침, 어디에나 뜬다. 완벽한 일상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일출은 비일상이 된다. 마치 어제 뜬 태양과는 다른 태양을 보는 듯 두근대는 건 달라진 배경 때문이겠지. 눈앞을 지나는 새들과 동일선상에 펼쳐진 듯한 구름을 두고, 아래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일. 나의 로망 역시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종종 내가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철이 없거나... 수많은 로망을 가득 담고 눈치를 본다. 마흔이 넘었으니 그만 궁금해도 될 것 같은 것들이 자꾸 궁금하다. 그럴 때 7살 아들에게 고마워진다. 그의 호기심과 그것을 표현해 내는 태도, 그리고 끈질김 덕분에 덤으로 나도 경험하는 것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엉뚱한 아이를 보면서 '쟤는 누굴 닮은 걸까?' 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나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욕망을 숨기는 성격을 타고났고, 아이는 그것을 표현해 내는 성격을 타고났을 뿐.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과한 욕망을 가진 건 아이와 내가 다르지 않다. 요즘 나는 아이를 통해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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