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이 구르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나.
내가 면허를 딴 건 2006년이었다. 입사한 첫 해, 한겨울 눈이 오는 날도 빠짐없이 학원에 나가 연습한 끝에 한 번에 합격했다. 새벽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던 시기였다. 아주 이른 새벽 첫 타임에 운전 학원에 갔다가 출근해서는 책상에 뻗어버리는 날들을 견딘 끝에 이룬 쾌거였다. 예상치 못한 달콤한 제안이 온 건 바로 그때였다.
"차 사는 대신 서울로 이사하면 아빠가 집값을 보태줄게."
당시 내가 일하던 회사는 수원이었고, 나의 집도 수원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대학 바로 옆에 집을 구했던 것처럼 취업이 확정되지 마자 회사 근처에 집을 구했다. 그런데 입사를 하고 보니 진짜로 수원에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방 출신인 내게는 아직도 수도권 개념이 낯설어 서울과 수원을 출퇴근 가능 지역으로 묶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퇴근해도 회사 근처를 맴돌아야 하는 나는 외로웠다.
집값 차이가 내가 수원에 집을 구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입사와 동시에 (월급도 타기 전에) "이제 너는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며 용돈을 끊어버리고 살던 집 전셋값마저 일부만 빌. 려. 주는 것으로 전환. 차액은 대출까지 하게 했던 아빠가 한 당시의 제안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빠는 왜 저런 제안을 했을까? 집은 부산, 회사는 김해. 이미 큰 도시에서 위성도시로의 출퇴근을 오래 해온 아빠는 고속도로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큰 사고를 목격한 것을 넘어 큰 사고를 여러 번 당하기도 하셨던 터다. 회사와 집을 수원에 두고 운전을 시작한 건, 당연히 수원 밖으로 운전해서 나가기 위함이었다. 아빠는 주말마다 직접 운전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나갈 딸이 걱정됐던 것이다. 멀리 사는 딸에게 큰 일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제안에는 그런 마음이 담겨있었다. 회사 출퇴근 버스가 워낙 잘 되어있으니, 차 없이 서울로 이사하면 출퇴근은 버스로 할 테고 주말을 서울에서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 나는 그 제안을 덥석 물었다.
18년이 지나는 동안, 세 번의 연수를 받았다. 이제는 정말로 운전을 해야겠다 싶은 순간들마다였다. 첫 시도는 결혼 첫 해였다. 언제나 운전을 말리던 부모님으로부터 더욱 확실히 독립하기도 했고, 결혼하면서 우리 차가 생겼으니 운전할 여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연수가 끝나갈 무렵 임신을 했다. 운전할 때마다 심하게 긴장하던 내가 운전에서 손을 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번째 연수는 첫째를 낳고서, 세 번째 연수는 둘째를 낳고서였다. 세 번째 연수 때 왔던 선생님이 첫날 수업 후 말했다.
"저를 왜 부르신 거예요? 이 정도면 그냥 혼자 몰고 길에 나가시면 돼요."
하지만 그 연수 후에도 나는 혼자 차를 몰고 나가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몇 번 운전을 하다가, 오래된 건물 지하 주차장 빙빙 돌아 내려가는 길에서 접촉사고가 났고, 바로 이어 코로나가 생기면서 외출할 일도 줄어든 데다가 남편이 차를 가지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다시 운전할 일 없이 3년이 지나갔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SUV로 차를 바꾸지 않은 건, 언. 젠. 가. 운전할 나를 위해서였는데, 언제 올지 모를 언젠가를 위해 모두가 불편을 감수하는 건 우스운 일인 것 같아 커다란 SUV로 차도 바꾸었다.
아직 20대이던 나는 스노우 스케이트를 즐겼었다. 처음 스노우 스케이트를 만났던 날, 나는 겁 없이 최상급 코스에 올랐다. 동호회 회원들이 모두 올라가길래 무작정 따라간 거였다. 정상에서 만난 깎아지른 듯한 코스에서도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구르고 구르면서 내려오는 모습에 당황한 건, 먼저 내려가서 코스를 올려다본 동호회 회원들이었다. 뭐야. 쟤 저러다 큰일 나겠는데. 아무리 발을 박아봐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아 활강하듯 미끄러지던 나를 향해 서너 명이 뛰어올라와 두 손으로 받아 겨우 멈췄다. (스노우 스케이트는 날이 짧아 코스를 거꾸로 뛰어오르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또다시 그 코스에 올라갔고, 어떻게든 내려왔다. 그때 오빠들이 말했다. "이야, 너 겁도 없고 운동신경도 좋은데? 운전하면 잘하겠어." 흐음. 그때의 나는 어디 갔을까. 그 용기를 불러와보려고 아무리 떠올려봐도 돌아오는 건 '그땐 그랬지.'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운전을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친정에 가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바닷가에 가는 길이었다. 문득 '내가 언제까지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닐 수 있을까? 이제는 내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를 편하게 모셔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던 차에 더 결정적인 사건이 생겼다. 둘째 팔 수술 후 매주 한 번씩 가는 병원 진료 날 택시를 잡을 때였다. 30분을 넘게 콜을 했는데 택시가 한 대도 잡히지 않았다. "꿈이야, 한 번만 더 호출해 보고 택시가 안 잡히면 이번주 병원은 포기하자." 하는데 오기 같은 게 생겼다.
딱히 엄청난 오기도 아니었다. 급할 때를 위해서 일단 새 차 시동 거는 법이라도 알아두자는, 소소한 오기. 운전 따위 내 인생에 더는 없을 거라던 마음을 밀어낸 건 이 소소한 결심이었다.
"오빠, 나 일단 시동 거는 법이라도 알려줘." 지난 추석 연휴, 어느 박물관의 텅 빈 주차장에서 시동 거는 법을 배우고 30m가량 나갔다 다시 주차하는 것으로 새 차 적응이 시작됐다.
오늘 아침, 집에서 20분 거리의 카페에 다녀왔다. 첫날, 둘째 날, 아파트와 담벼락만 돌고, 셋째, 넷째 날, 한 블록을 더 돌았다. 다섯 번째 날, 한 블록을 더해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를 운전하고 돌아왔다. 모든 날 운전한 기록은 딱 20분. 그리고 오늘,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기'를 시도했다. 운전한다면 내 차로 가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 생각했던 호숫가의 카페.
어제 마음을 먹고는,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간다면 만나자고 할 사람도 있었는데 연락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문득 운전하기가 너무너무 두려워질 수도 있으니까. 미리 약속을 잡아둔다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모든 걸 보류로 두었다. 아침에는 갑자기 너무 졸렸다. 이렇게 졸리는 날은 자야만 한다며 스르륵 주저앉던 나에게 동네 친구가 말했다. "안 돼요. 오늘 가야 돼요. 내일은 비 온대요. 내일은 못 하니까 오늘 꼭 갔다 와요." 하하, 매번 "그럼 자."라고 하던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다. 덕분에 나는 차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차키를 찾으면서 잠시, 남편이 차키를 가지고 갔기를 바랐는데, 너무 버젓이 책장에 차키가 놓여 있었다.)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어제저녁에도 이미 입력해서 길을 미루 봐둔 터였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 지하 주차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사실은 타이어 굴림이?) 아직 어색했지만, 길 위에 서면 어차피 돌아서지 못할 일이다. 그 자리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네비에 입력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결국은 도착했다. 손에 땀을 쥐는 일을 몇 번 겪은 후에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더니,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래도 도. 착. 했다. 3년 전 운전을 그만두기 전부터, 꼭 운전해서 가보고 싶었던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 이번에도 글이 길어지는 바람에, 그 깨달음은 다음 글에 이어갈게요. 그 다음글 링크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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