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마지막 날. 원래 오늘은 새로 산 TV가 배송되기로 한 날이었다. 어젯밤까지도 분명 오늘이던 배송예정일이 아침에 확인하니 내일로 바뀌었다. TV 설치로 빼 둔 하루가, 아무 일정 없는 하루가 되었다. 뭐 할지 고민하다 보니 슬금슬금 시간만 가고, 씻고 나와 보니 오랜만에 닌텐도 게임기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으음.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을 계획이구나.'
아마도 남편은 연휴 마지막 날 굳이 나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테고, 닌텐도 앞에서 아이들은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았을 테다. 이 순간, 집 밖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 하나뿐임을 직감했다. 그래. 나는 간절히 집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남자들의 게임 본능이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서 너그러워지려고 매우 노력하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우리 집 남자들이 게임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얼마나 더 할 거냐? 이미 많이 하지 않았냐?" 조금만 지나면 그렇게 질문하게 될 게 뻔하다. 아이들에게는 10분이, 나에게는 1시간으로 느껴질 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집 안에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카페에 나가서 책 좀 읽다 올게."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고, 세 남자 모두 흔쾌히 그러라고 말했다.
사두고 아직 못 읽은 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챙겨 넣고 집 앞 스타벅스로 향했다. 창 밖에 하늘과 초록이 보이고, 내부는 크림과 우드톤으로 디자인된, 적당히 느슨한 분위기의 카페라면 더 좋겠지만, 집 앞에서 고르자니 스타벅스가 최선이다. 역시 예상대로 스타벅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득 차다 못해 빈 의자가 딱 하나뿐인 실내에서 창가 바 자리를 겨우 잡았다. 좌우의 노트북 사이에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책을 꺼냈다. 앱을 켜니 쿠폰이 있다. 그 쿠폰 덕에 지출 없이 주문한 커피 한 잔. 오, 완벽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아주 오래전부터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이다. 그런데도 아직 못 읽은 건 왜였을까. 제목은 처음 봤던 순간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밀란 쿤데라라는 네임 밸류가 주는 궁금증도 꽤 컸는데,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새롭지가 않았다. 매번 내용이 더 궁금한 새로운 책들에게 밀려났고, 지금껏 새 책인 채로 책장에만 꽂혀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책을 집어든 건, 연휴 내내 아이패드를 이용해 읽었던 이북들에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그것도 책인데, 영상 미디어를 오래 봤을 때와 비슷한 지리함이 느껴졌다. 책장을 살펴 아직 읽지 않은 종이책을 골라냈고, 그게 이 책이었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와 자리에 앉은 지 두 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쉬울 리 없는 이야기니까, '참을 수 없는' 일이란, 심지어 그게 '가벼움'일 때 그걸 쉬이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책장도 느리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게는 너무나 흥미로운 주인공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가벼움과 무거움, 진심과 위선, 소망과 현실, 그리고 결코 다 알 수 없을 너와 나의 마음. 그것들이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해서 자꾸 책장이 넘어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집에 가야겠다며 정리하면서 보니, 또 책장을 그리 많이 넘기지는 못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지만, 그 시간에는 불균형이 있었나 보다.
'집에 가는 길에 올리브영에 잠깐 들러야지. 아이 브로우를 하나 사야겠어.' 하며 집 앞 쇼핑몰에 들어선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다 보니, 이번 연휴에 새로 개봉한 영화들의 광고가 뜬다. 지금 이 시간 5층 영화관엔 영화배우 강동원이 와 있다지. 누군가는 좀 아까 1층에서 직접 목격했다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집 앞이 꽤 근사하다고. 책을 읽을 카페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필요한 걸 사야지 마음먹으면 슬쩍 들를 수 있는 쇼핑몰도 있는 곳. 집 앞의 행복이 여기에 있다.
집에 들어오니 게임을 끝내고 욕실에서 놀던 아들들이 밝은 얼굴로 엄마를 맞이한다. 그들은 내가 집 앞의 행복을 누리는 동안 집안의 행복을 마음껏 누렸다. 그렇게 우리의 연휴 마지막날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