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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May 19. 2023

갑자기 꽃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십년 전의 나는 모르던 내가...

"나한테는 꽃 선물 안 해도 돼. 꽃처럼 비실용적인 게 없잖아. 며칠 지나면 시들어버릴 꽃에 돈 쓰지 말자."


결혼한 지 10년. 이제는 이런 말도 할 필요 없는 날들을 살지만, 나에게도 꽃을 선물하고 싶어 하는 남자친구와 연애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미리 못 박아 두었다. 나에게 꽃선물은 할 필요 없다고. 차라리 실용적인 다른 걸 사달라고. 


진심이었다. 세상에 꽃을 사는데 돈 쓰는 것만큼 아까운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에게도 십몇 년 전에 똑같은 말을 했다. 십수 년 후에 내 마음이 이렇게 바뀔 줄 그때는 몰랐다. 이 남자가 본인 돈으로 나를 위한 꽃을 산 건 딱 한 번, 프러포즈 날이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그날의 꽃은 아깝지 않았다. 그 후로 한 번 더 꽃을 받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꽃은 회사 친목행사에서 만든 것이었으니 엄밀히 말해 이 남자 대신 회사가 사준 꽃이다.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꽃에 관심이 없던 최근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꽃이 가지고 싶어졌다. '내가 아무리 꽃선물이 싫다고 했기로서니 이렇게 한 번을 안 할 수가 있나.' 싶어 서운한 마음도 생겼다. 그러다가 이내 '뭐, 사지 말라고 한 내 탓이지.' 했고, 남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오빠, 나 이제 꽃이 좋아졌어. 그러니까 나한테 꽃 선물 해줘도 돼." 그저 사람 좋게 웃던 남편은 그 후에도 단 한 번도 꽃을 사 오지 않았다.


쳇, 상관없다. 어차피 누가 사든 똑같이 꽃 아닌가. 그때부터는 꽃을 받는 대신 사고 싶어졌다. 내가 사고 싶은 내 취향의 꽃을 사다가 내 책상에 꽂고 싶어졌다. 아파트 단톡방에 올라오는 꽃 공구에 참여하고, 지인이 판매하는 꽃을 구매하고, 꽃시장에도 가보고, 농장직송 온라인 꽃 판매장에도 기웃거렸다. 


아들 둘을 키우는 집. 깔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집에 꽃은 둥둥 떠다니는 이세계 같아 보였다. 아이들이 꽃병을 넘어뜨릴까 봐 나의 작은 책상 귀퉁이에 두고 보면서는, 이거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지 싶었다. 으흠..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라.. 근데 왜 돼지는 진주 목걸이를 하면 안 되는 거지? 그 돼지가 진주 목걸이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냥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웃는 시선이 더 나쁜 거 아냐? 그래. 우리 집이 예쁘지 않다고 해서 꽃도 두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날부터 나는 더 자유로이 꽃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게 아마 작년 봄. 그리고 다시 맞은 이 봄에 나는 결심했다. "작약을 살 거야." 작약을 사고 싶은 만큼. 충분히 자꾸자꾸 사겠다고 선언했다. 탁구공같이 동그란 봉오리 상태로 주로 파는 작약은, 물에 꽂아두면 금세 왕호빵보다도 크게 피어난다. 처음 작약을 만났을 때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렇게 작은 봉오리 안에서 이만한 꽃이 터져 나올 수 있다고? 아니, 이 줄기가 이만한 꽃을 감당할 수는 있는 거야? 맨질맨질한 봉오리의 단단함이 좋았던 나는 보송보송 커져버린 꽃송이에 살짝은 실망도 했더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꾸 생각났다. 동그란 봉오리가 솜사탕처럼 피어나는 그 순간이. 다 피어버린 꽃에 큰 흥미를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피어나는 순간이 경이로워 자꾸 작약을 샀다. 


어차피 피고 나면 시듦으로 향하는 꽃. 며칠 가지 않아 시들면 버리는 것도 일이라며 투덜대면서, 이번에는 두 단이나 주문했다. 왜 그랬는지, 왜 열 송이나 가지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배달된 열 개의 꽃봉오리는 실망스러우리만큼 초라했다. 꽃병에 꽂아두니 허전해 보이기까지 했던 열 송이 꽃은 다 피고 나니 꽃병이 터져버리는 것 아닐까 싶게 풍성해졌다. '곧 지겠구나' 다 펴버린 작약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을 오늘도 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이야, 보송보송하다. 이렇게 보송한 핑크라니.' 


나는 이제 작약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작약을 사랑하는 이유가 다 핀 작약의 보송함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다음에는 좀 더 뻔하게 아름다운 장미를 사야겠다 생각했었는데, 한번 더 작약을 주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에는 꽃시장을 가볼까. 5천 원짜리 커피를 사러 가면서 버스비를 아끼겠다고 다섯 정거장을 걷는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실용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꽃을 위한 소비를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하고 싶다면 꽃시장은 분명 좋은 선택일 테니 말이다.


오늘 여기 내 눈앞의 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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